[류태형의 음악이 있는 아침] 흑백과 미니멀리즘의 궁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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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이 지났지만 생생하게 떠오르는 공연이 있습니다.

2001년 3월 2일 홍콩 콰이 칭 극장에서 열린 필립 글래스와 크로노스 4중주단의 ‘드라큘라’ 콘서트가 그것입니다. 홍콩아트페스티벌의 일환이었죠.

클래식 팬들 뿐 아니라 영화 팬, 대중음악 애호가들 등 다양한 부류의 관객들이 모였습니다.
공연이 시작 전 얇은 막이 앞에 있었습니다. 이윽고 공연장의 불이 꺼졌죠.

1931년 유니버설 필름의 토드 브라우닝 작 ‘드라큘라’의 영상이 스크린에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음악이 흐르고 조명이 들어오자 연주자들의 모습이 윤곽을 드러냈는데요.

키보드를 연주하는 필립 글래스를 가운데로 크로노스 콰르텟 주자들이 두 명씩 양쪽에 포진했습니다. 마이클 리즈먼은 가장 아래 가운데에서 모니터를 지켜보며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곡의 진행에 따라 조명이 변했습니다. 조명이 강해지면 연주자들의 모습이 부각되었고 조명이 흐려지면 영화와 오버랩됐습니다. 조명 없이 영화만 계속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필립 글래스의 음악은 미니멀리즘의 거장답게 단순한 반복음을 미묘하게 변화시키며 화면에 오싹한 긴장감을 불어넣었습니다.

22일, 23일 LG아트센터, 25일, 26일 통영국제음악당 블랙박스에서 필립 글래스의 필름 오페라 ‘미녀와 야수’가 공연됩니다.

장 콕토의 흑백영화 ‘미녀와 야수’가 ‘필름 오페라’라는 형식으로 재탄생합니다.

무대 위에서는 필립글래스앙상블이 연주하고, 4명의 성악가가 배우들의 대사를 절묘하게 맞춰 노래합니다.

95분간 한 편의 흑백 오페라가 손에 땀을 쥐게 할 것입니다.

단순한 음계와 단순한 색조는 잘 어울립니다.

흑과 백의 바둑돌이 만드는 무궁무진한 반상의 드라마처럼 산만한 시대에 몰입의 체험을 선사할 무대로 기대됩니다.

류태형 음악칼럼니스트ㆍ객원기자 mozar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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