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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돈 마련 독 오른 오빠, 2억 보험금 노려 여동생까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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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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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부산경남경마공원 야외 흡연구역에서 경마에 베팅한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며 모니터를 통해 레이스를 지켜보고 있다. [부산=송봉근 기자]

나는 19년간 사건 현장을 뛰어온 수사 분야 베테랑 형사다. 살인 등 수 많은 강력 사건을 다뤄 봤지만 나 같은 경찰조차 소름 끼치고 분노하게 만든 사건이 있다. 지난해 9월 울산에서 벌어진 ‘여동생 독극물 살인’ 사건을 수사했을 때다.

도박에 빠진 대한민국 <하> 꼬리 무는 2차 범죄
형사 눈에 비친 범죄의 재구성
1년간 도박으로 3억원 넘게 탕진
경찰 잡혀와 “안 죽였습니다” 발뺌

당시 지목된 용의자는 충북 제천에 사는 친오빠 신모(25)씨였다. 그는 여동생이 생명보험(사망 시 2억원)에 들도록 하고 여동생에게 독극물을 먹여 살해한 혐의로 긴급체포됐다. 오빠 신씨의 친구 차량 트렁크에서 500mL가량의 청산가리와 붕산·염화제2수소 등 독극물을 찾아내 압수했다. 여동생의 몸에서 청산염이 검출됐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부검 결과를 바탕으로 오빠 신씨를 추궁해 살인 혐의로 구속했다.

어려서 부모와 떨어진 남매는 친척집을 오가며 20년을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 여동생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오빠를 믿고 따랐다.

“조심히 가…. 혹시나 음주하지 말고.”

지난해 9월 22일 여동생이 그에게 보낸 마지막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니 마음이 씁쓸했다. 오빠가 소화제라고 속인 청산가리 캡슐을 먹고 숨지기 전까지도 여동생은 오빠의 안부를 걱정했다. 네일아트 학원을 다니며 작은 가게를 내겠다던 여동생의 꿈을 앗아 간 범인이 다름 아닌 친오빠라는 사실이 믿기 힘들었다.

신씨의 범행 동기를 수사해보니 도박중독이 원인이었다. 긴급체포되기 전인 지난해 10월까지 심각한 도박중독 상태였다. 사설 스포츠토토와 바카라 같은 인터넷 도박으로 1년간 탕진한 돈은 3억원이 넘었다. 도박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저축은행에서 5600만원을 대출받았다. 아내가 다쳐 받은 상해보험금 7500만원도 대부분 도박으로 날렸다.

조사실에 앉은 그에게 "왜 동생을 죽였느냐”고 물었다. 청산가리를 구입한 사실, 여동생을 만날 무렵 ‘청산가리’ 등을 인터넷으로 검색한 증거를 제시하며 캐물었지만 그는 “안 죽였다”며 강하게 부인했다.

조직폭력배들도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들이대면 눈동자가 흔들리는데 마주 앉은 신씨는 여동생을 죽이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냉혈한 같은 그를 보면서 뻔뻔함을 넘어선 도박의 광기에 전율했다.

평범한 중고 휴대전화 판매원이 도박쟁이로 전락해 5000만원의 빚을 졌다. 도박자금 마련을 목적으로 여동생을 살해한 그는 이미 인면수심의 ‘괴물’로 변해 있었다. 신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항소했다.

이 사건을 마무리한 뒤에도 도박 범죄 뉴스만 나오면 귀를 쫑긋 세운다. 도박 관련 범죄를 들여다보면 부모·형제·자식을 사람이 아닌 도구처럼 취급하는 도박의 해악과 폐해가 드러난다. 돈을 위해 너무 쉽게 범죄를 저지르는 배금(拜金)주의, 물신(物神)주의 사회의 비뚤어진 모습도 확인하게 된다. (※이상은 담당 형사의 눈으로 이 사건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신씨 사건처럼 도박은 단지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가정 파탄은 물론 최근에는 패륜 범죄로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도박에서 시작해 흉악한 2차 범죄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한림대 조은경(심리학) 교수는 “도박중독자들이 궁지에 몰리면 가족을 마지막 탈출구로 이용하려 하기 때문에 도박과 연계된 2차 범죄에서 가족이 희생되는 경우가 많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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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에 빠져 빚더미 오른 배관공
아내·딸 살해 뒤 스스로 목숨 끊어
전문가 “마약처럼 예방책 시급”

충북 제천경찰서 형사는 “예전에는 도박자금을 날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오직 돈을 위해 가족을 쉽게 살해하는 2차 범죄가 많다”고 말했다.

평범한 도시가스 배관공이 일가족을 살해한 사건도 마찬가지다. 지난 2일 도박중독에 빠진 박모(46)씨가 아내 최모(40)씨와 딸(15)을 살해한 뒤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발견 당시 모녀는 온몸에 10여 군데나 흉기에 찔려 있었다.

경찰은 박씨 승용차 안에서 ‘3월 2일 우리 가족은 끝났다’는 내용이 적힌 A4 용지 한 장짜리 유서를 발견했다. 경찰은 박씨가 가족을 살해한 뒤 고향인 정선으로 이동해 자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차 안에서 카지노 입장권도 나왔다. 박씨는 평소 ‘바다이야기’ 등 도박 게임에 빠져 빚을 많이 졌 던 것으로 드러났다.


▶도박에 빠진 대한민국
① 알바 인생 싫어 2억 연봉 토사장 된 20대 "난 늘 불안했다”
② 땅 판 돈, 퇴직금 수억씩 날린 그들…서울~정선 위험한 질주



동국대 곽대경(경찰행정학) 교수는 “살기 팍팍해진 경제 상황에서 많은 사람이 도박을 현실 도피 수단으로 택하고 있다”며 “도박도 마약처럼 중독 문제로 인식하고 조기 예방이 가능하게 정부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특별취재팀=박진호·최종권·유명한 기자 park.jinho@joongang.co.kr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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