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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속 사나이’ 희망의 시심, 어두운 세상 빛이 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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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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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문학관 ‘닫힌 우물’에 선 이준익 감독. 이 감독은 “동주의 시를 읽으며 시인을 슬프게 한 시대와 지금 우리를 돌아봤으면 한다”고 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언덕을 오른다. 아직 바람이 차다. 서울 종로구 청운동 윤동주 문학관 옆에 조성된 ‘시인의 언덕’이다.

[현장 속으로] 영화 ‘동주’ 흥행…시인이 남긴 흔적을 찾아서

1941년 5월에서 9월, 연희전문(현재 연세대) 학생이던 시인 윤동주(1917~45)는 서촌으로 불리는 종로구 누상동 9번지에 있던 소설가 김송(1909~88)의 집에서 하숙을 했다. 가끔은 인왕산 자락을 오르며 이 바람을 맞기도 했을 게다. 41년 6월 2일 쓴 시 ‘바람이 불어’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바람이 부는데/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2016년, 다시 윤동주가 소환됐다. 그의 일생을 다룬 영화 ‘동주’는 개봉 2주 만에 관객 80만 명을 모으며 흥행을 이어간다.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은 인터넷서점 베스트셀러에 수주째 머물고 있다.

 만주에서 태어나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삶을 마감한 윤동주가 서울(당시 경성)에 머문 기간은 길지 않다. 대학 시절인 1938년 봄부터 42년 봄까지였다. 하지만 이 기간은 그의 시심(詩心)이 만개한 시기였다. ‘서시’ ‘별 헤는 밤’ ‘자화상’ 등이 다 이때 탄생했다. 영화 ‘동주’의 이준익 감독과 함께 서울에 남아 있는 그의 흔적을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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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전문 시절 ① 과 일본 유학 시절 윤동주(위 오른쪽)와 송몽규(아래 가운데) ②. [사진 윤동주기념사업회·소와다리·메가박스]

 ◆깊고 어두운 영혼의 우물=윤동주가 하숙했던 누상동 집터는 당시엔 단독주택이었지만 지금은 연립주택으로 바뀌었다. 건물 벽에는 ‘윤동주 하숙집터’라고 적힌 색색의 우산이 매달려 있다.

하숙집에서 청운효자동주민센터 골목을 따라 30여 분 오르면 윤동주 문학관이 나타난다. 2012년 종로구가 버려진 수도가압장을 개조해 만든 200㎡ 면적의 자그마한 건물이다.

이 감독은 영화를 준비하기 오래전부터 이곳에 자주 들렀다고 했다. “거창하지 않고 소박하게 꾸며진 게 윤동주란 인물을 잘 드러내죠. 배우와 스태프에게도 꼭 들러보라 권했습니다.”

 입구에 들어서면 전시실 ‘시인채’가 나온다. 스물여덟 해 짧았던 시인의 일생이 빛바랜 사진 자료, 친필 원고와 함께 전시돼 있다. 영화 개봉 후 문학관에는 하루 1000여 명이 찾아온다. 전시된 사진 속에는 윤동주의 대학 후배로 이 동네에서 함께 하숙했던 정병욱(1922∼82)도 있다.

영화에 나오진 않지만 그는 윤동주에게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 3권의 시집 필사본을 만든 윤동주는 한 부는 본인이 갖고, 정병욱과 스승 이양하(1904~63) 교수에게 한 부씩 맡겼다고 한다. 하지만 정병욱의 시골집 마루 밑에 숨겨뒀던 한 부만 살아남았다. 덕분에 윤동주의 시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야외 정원 ‘열린 우물’ 옆의 ‘닫힌 우물’은 가장 사랑받는 장소다. 물탱크 내부를 그대로 살린 깜깜하고 축축한 공간, “정말 우물 안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라고 이 감독이 말한다. 윤동주는 ‘우물 속의 사나이’였다. 이곳에 잠시 눈을 감고 서 있으면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가다, 다시 가엾어져 우물로 돌아오던”(‘자화상’) 시인의 마음이 내 것처럼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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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가 생활한 연희전문 기숙사(핀슨홀)③, 연세대 윤동주 기념실 ‘시인의 책상’④. [사진 윤동주기념사업회·소와다리·메가박스]

 ◆‘새로운 길’에서 ‘참회록’까지=신촌 연세대로 발길을 옮긴다. 1938년, 시대는 어두웠으나 고향을 떠나 서울 생활을 시작하는 청년은 조금쯤 두근거렸던 모양이다.

입학 후 처음 쓴 시는 ‘새로운 길’이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고개를 넘어서 마을로//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나의 길/새로운 길.” 연세대 정문으로 들어가 백양로를 오르면 왼쪽 동산에 ‘윤동주 시비’가 있다. 그 뒤편 옛 모습 그대로 서 있는 건물이 당시 연희전문 기숙사였던 ‘핀슨홀’이다. 핀슨홀 2층에 윤동주 기념실이 있다.

 영화 ‘동주’ 속 학교 장면은 모두 연세대에서 찍었다. “이쪽은 연희전문, 저쪽은 릿쿄대였다”고 이 감독이 설명한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전시실에서 반가운 인물을 만날 수 있다. 윤동주의 고종사촌 송몽규(1917~45)의 흔적이다.

영화는 같은 해 태어나 함께 성장해 같은 해 같은 형무소에서 숨진 둘의 관계를 조명한다. 열여덟에 신춘문예에 당선된 문인이자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한 행동파였던 사촌형 몽규는 동주에게 동경과 부끄러움의 대상이었다. 둘은 연희전문에도 함께 입학해 같은 기숙사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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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55년판 ⑤, 영화 ‘동주’의 한 장면 ⑥. [사진 윤동주기념사업회·소와다리·메가박스]

이 감독은 “영화 ‘동주’의 가장 큰 수확이라면 송몽규라는 인물을 세상에 알린 것”이라며 “송몽규처럼 젊음을 독립운동에 바치다 이름 없이 스러진 이들이 수없이 많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새로운 길’을 읊으며 신촌에 입성했던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앞두고 1942년 1월 24일 고국에서의 마지막 시 ‘참회록’을 쓴다.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이 되어 닷새 후 히라누마 도쥬(平沼東柱)로 창씨개명하고 유학을 떠났다. 영화엔 일본에서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된 동주와 몽규가 취조 받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지금까지도 군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일본의 모순과 부도덕을 비판하려 했다”고 말했다.

송몽규의 9촌 조카로 영화의 모티브가 된 『윤동주 평전』을 쓴 송우혜 작가는 “더 없이 당당하고 강건한 시인의 모습이 드러난 윤동주의 판결문을 꼭 한 번 읽어보라”고 권했다. “윤동주의 시는 어두울 때 빛나는 시다. 그의 아름다운 시어 뒤에 있는 강인함을 읽어내길 바란다.”

 ▶윤동주 문학관=서울 종로구 창의문로 119, 오전 10시~오후 6시(매주 월 휴관), 무료, 02-2148-4175 ▶윤동주 기념실=서울 서대문구 연세로 50 연세대 내 핀슨홀 2층, 평일 오전 9시~오후 6시, 무료, 02-2123-2247

[S BOX] 윤동주 시에 세 번 나오는 ‘순이’…“이화여전 여학생 짝사랑”

영화 ‘동주’에는 두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연희전문 시절 윤동주와 문예지를 만든 이화여전 학생 이여진과 시집 출판을 돕는 일본 여성 쿠미다. 둘은 허구의 인물이다. 이준익 감독은 “시인의 연애에 대한 기록은 없다. 윤동주의 시에 ‘순이’란 이름이 여러 번 등장하는데, 이를 반영해 이여진이란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했다.

‘순이(順伊)’는 그의 시에 세 번 나온다. 연희전문 1학년 때 쓴 시 ‘사랑의 전당’에서 윤동주는 “순(順)아 너는 내 전(殿)에 언제 들어왔던 것이냐?/내사 언제 네 전(殿)에 들어갔던 것이냐?”라고 적는다. 자신도 모르게 사랑에 빠진 순간을 상상하게 하는 구절이다. 이듬해 쓴 ‘소년’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굴”이 등장하고, 4학년에 쓴 ‘눈오는 지도’에선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 이별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시인 정지용은 1948년 발간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문에서 윤동주의 동생 일주에게 형에 대해 묻는다. “무슨 연애(戀愛) 같은 것이나 있었나?” 동생의 대답. “하도 말이 없어서 모릅니다.”

후배 정병욱은 76년 『나라사랑』 특집호에서 윤동주가 이화여전 학생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졌다고 말한다. “그 여자에 대한 감정이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는 것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중략) 그러나 내가 아는 한으로는 동주 형과 그 여학생이 밖에서 만난 일은 없었다.”

※참고 : 송우혜 『윤동주 평전』, 김응교 『처럼』

글=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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