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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로 뛰어든 화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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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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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뉴디지털실장

지난주 막을 내린 올해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의 두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가상현실(VR), 그리고 지금의 LTE(4G)보다 전송속도가 훨씬 빠른 5세대(5G) 이동통신이었다. 마치 놀이공원을 연상시키는 VR 체험관을 마련한 삼성전자 등 세계 유수의 모바일 강자들의 대규모 부스엔 인파가 하루 종일 몰려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여기를 봐도 VR, 저기를 봐도 VR이었다.

그런데 부스 하나 없이 화제를 모은 곳도 있었다. 언뜻 보기엔 MWC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프랑스 화장품 기업 로레알이었다. 로레알은 잘 알려진 대로 랑콤·보디숍 등 32개의 글로벌 화장품 브랜드를 보유한 세계 1위 화장품 업체다.

MWC는 전시관뿐만 아니라 모바일을 주제로 한 다양한 콘퍼런스를 운영하는데, 로레알은 행사 첫날의 모바일미디어서밋(MMS)을 비롯해 나흘간의 행사 기간 동안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콘퍼런스에 등장해 참가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게다가 행사 말미엔 로레알의 메이크업 가상체험 앱인 ‘메이크업 지니어스’가 MWC를 주최한 세계이동통신사업자협회(GSMA)로부터 ‘가장 혁신적인 모바일 앱’상을 받기까지 했다.

 뷰티산업 박람회도 아닌 최첨단 모바일 기술의 각축장에 설립한 지 100년이 넘은 화장품 회사가 이토록 주목을 받다니. 이 모든 게 로레알이 몇 년 전부터 추진해온 디지털 혁신 덕분이었다.

로레알은 2014년 화장품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최고디지털책임자(CDO·Chief Digital Officer)를 임명할 만큼 공격적으로 디지털 투자를 늘려 왔다. 지난 한 해 동안에만 디지털 전문가를 1000여 명이나 새로 고용했다고 한다. 130개국에 포진해 있는 전 세계 직원을 모두 합해 8만 명이 안 되는 걸 감안하면 상당한 숫자다.

MWC에 연사로 나선 하이메 델바예(Jaime del Valle) 로레알 스페인 최고마케팅책임자(CMO)는 “디지털은 단지 마케팅 수단이 아니라 비즈니스 모델의 변화 그 자체”라며 “디지털 기업으로의 전환을 통해 2020년엔 전체 매출의 20%를 e커머스(전자상거래)에서 올리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고 했다.

로레알이 2, 3위 업체와 점점 격차를 벌리며 세계 1위를 유지하는 건 이렇게 화장품이라는 작은 그림 대신 모바일이라는 큰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 아닐까.

‘중국의 모바일 굴기’라고 불릴 만큼 중국의 급부상이 화제였지만 MWC에선 한국이 여전한 중심국이다. 하지만 전자나 통신 같은 테크 기업, 그것도 대기업만 눈에 띄는 게 아쉽다. 로레알이 더욱 부러웠던 이유다.

안혜리 뉴디지털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