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대학생 칼럼

20대에게 아버지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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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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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범
고려대 역사교육과 4학년

지난해 아버지가 34년의 직장생활을 끝내고 정년퇴직하셨다. 아버지 회사에서 제공하는 학사에서 5년간 살던 나도 그곳을 나와야 했다. 학교 근처에 원룸을 구했는데 5층이었다. 이사하는 날, 아버지의 승용차로 학사에 있던 짐을 옮겼다. 그런데 원룸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계단으로 일일이 짐을 날라야 했다. 약간 힘들긴 해도 나는 무리 없이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달랐다. 3층 정도 올라오시더니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다리에 힘이 풀리신 듯했다. 우여곡절 끝에 짐을 다 옮긴 뒤 아버지는 방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으시더니 한동안 숨을 고르셨다.

 올해로 아버지는 62세다. 체력적으로 부담스러울 나이 때가 된 것이다. 더군다나 20여 년 전 출장 중에 교통사고로 척추 신경을 크게 다친 적이 있어 오늘날까지도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신다. 이런 아버지를 보며 왜 이리 측은한 감정이 드는 것일까. 아버지는 그대로인데 내 눈에는 하루하루 작아지는 것 같다. 어렸을 적에는 호랑이 같았던 아버지가 이제는 순한 양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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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아버지’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와 감정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내 나이가 몇인지에 따라 아버지라는 단어가 주는 깊이도 다를 것이다. 나처럼 20대 중반에 접어들어 사회로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는 대학생들에게 아버지는 어떠한 모습일까. 세월이라는 무게 앞에 늙어 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확연히 보이는 때인 것 같다. 태평양 같이 넓어 보였던 아버지의 어깨가 이젠 너무 좁아 보이기도 한다. 가장으로서 그동안 느꼈을 책임감과 중압감을 떠올려 보며 고마움과 미안함의 감정도 교차한다. 한편으로는 아버지에 대한 이러한 감정을 더 늦기 전에 가질 수 있어 다행이기도 하다.

 요즘 ‘수저계급론’이 한창 유행이다. 하지만 우리가 태어났을 때 수저가 무슨 색인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내가 쥔 수저 위에 올라갈 밥과 반찬이 끊기지 않도록 뛴 아버지가 계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이제까지 지니고 있던 ‘가장’이라는 부담을 조금이라도 나에게 떼어 주셨으면 좋겠다. 더 이상 아버지 품에 안기고 싶지 않다. 이젠 아버지를 내 품 안에 안고 싶다. 가수 싸이가 불렀던 ‘아버지’라는 노래 가사가 새삼 떠오른다. ‘아버지 이제야 깨달아요. 어찌 그렇게 사셨나요. 더 이상 쓸쓸해하지 마요. 이제 나와 같이 가요.’

박찬범 고려대 역사교육과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