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컬렉터가 미술사를 완성한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67호 29면

신학철 ‘모내기’, 유화, 112.1×162.2㎝, 1987

미술품 수집가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 눈은 어두운 구석이 많다. 미술품 값이 한두 푼이 아닌데다 먹고 사는 데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라 그야말로 있는 자들 돈 놀음 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투자 가치가 높다 해도 가짜 작품 사건이 자꾸 터지는데다 일부 기업체나 재벌이 돈세탁에 활용하고 있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떠도는 실정이다. 좋은 뜻으로 멋진 컬렉션을 꾸린 이들도 쉬쉬하며 숨기기 바뿐 저간에는 이런 사정이 있다.


지난 달 28일 서울 인사동길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개막한 ‘한국 현대미술의 눈과 정신 Ⅱ-리얼리즘의 복권’은 미술품 컬렉터의 구실이 얼마나 소중한지 돌아보게 한 전시다. 1980년대 부흥했던 한국 리얼리즘 미술의 흐름을 8명 작가 작품으로 훑은 이 자리는 뚝심 있는 수집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지난 3일 오후 전시장에서 열린 좌담회에서 이종구(62) 작가는 “내 그림인데도 23년 만에 봤다”고 감회에 젖었다. 누군가 자신의 작품을 사서 소중히 보관해줬기에 재회의 기쁨을 누린 것이다.


‘리얼리즘의 복권’전은 흔히 ‘민중미술’이라 불렸던 한국 현대미술의 핵심 사조를 30여 년 만에 불러내 우리 뿐 아니라 세계인에게 내보이려는 뜻을 담고 있다. 당대의 정치적 사안을 비판적 시각으로 담아낸 현실주의 미술에 쏟아진 정권의 탄압과 대중의 몰이해 탓에 작가는 물론, 작품의 운명도 순탄치 않았다. 신학철(72)씨의 1987년 작 ‘모내기’는 그 대표 격이다. 이른바 ‘공안(公安) 비평’에 걸려 지금도 검찰청 압수물 보관창고에 남아있다. 다행인 것은 이 작품을 꼭 소장하고 싶다는 어느 애호가의 소원에 작가가 똑같이 그려줬기에 ‘모내기’는 그나마 사라지지 않게 됐다.


신학철씨 뿐 아니라 이번 전시에 초대된 민정기·임옥상·황재형·이종구씨는 작품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일을 여러 번 당했던 전력이 있다. 그럼에도 알음알음 작품을 사준 컬렉터 덕에 오늘의 전시가 가능해졌다. 전시 자문을 맡았던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어려운 시절을 함께 해준 핵심 컬렉터가 3~4명 됐다”고 회고했다. 그 중 한 명이 청관재(靑冠齋) 조재진(1946~2007)이다. ‘청관재 컬렉션’이라 이름 붙인 그의 수집품 중 리얼리즘 미술 147점은 2008년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들어갔다.


유 석좌교수는 이들로부터 들었다는 리얼리즘 미술품 수집 이유를 공개했다. 첫째, 싸다. 둘째, 그림 됨됨이가 좋다. 셋째, 조선시대 혜원 신윤복이 그린 속화처럼 시대상을 담고 있다. 혜원도 당대에는 이해받지 못하고 내쳐졌다. 넷째, 몇 십 년 뒤엔 작품 값이 오를 것이라고 확신한다. 단순명쾌한 컬렉션 철학이 나름 미술품 수집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 이들이 없었다면 한국 현대미술사의 상당 부분이 사라질 뻔했다. 28일까지 이어지는 이 전시야말로 진정한 컬렉터의 기능과 가치를 되새기게 하는 현장이다.


정재숙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