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21. 식민지 시대의 영화-박노자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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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발표된 '월하의 맹서' 이후 80년간 영화는 줄곧 한국 사회에서 대중문화의 핵심적 지위를 차지해 왔습니다.

어떤 예술 장르보다 강력한 감수성과 흡입력을 무기로 식민지 시기에 한편에선 총독부의 통치수단으로 기능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를 통해 자신과 타인의 모습을 반추하며 울고 웃을 수 있었던 점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박노자 교수는 영상물이 권력의 선전 선동 수단으로 활용돼 온 역사를 비판적으로 조명합니다. 나아가 일본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됐을 뿐만 아니라 서양 미학의 정착에도 기여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에 대해 문화침략과는 다른 관점으로 접근한 허동현 교수는 오히려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자세를 통해 서구문화를 빠르게 소화하면서 오늘날 한국 영화의 생존과 성공을 이룩할 수 있었다고 진단합니다.

어릴적 제가 다니던 학교에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어록이 곳곳에 걸려 있었는데, 그 중 특히 생생하게 기억나는 문구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예술은 바로 영화다"라는 사회주의 혁명가 레닌의 말입니다. 문맹률이 70%에 달했던 당시 러시아에서 공산화 작업에 대중의 참여를 유도하려면 영화의 엄청난 대중 동원력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문맹률이 러시아를 약간 웃돌았던 식민지 조선은 어땠을까요? 식민 당국의 통치 프로젝트는 물론 온건 우파의 문화 민족주의, 좌파의 계급 전선 작업, 그리고 외국 자본 등은 모두 영화를 필요로 했습니다.

특히 총독부는 조선 통치에 필요한 영화들을 다양하게 제작했습니다. 예컨대 한국 최초의 극영화로 평가받는 '월하의 맹서'(1923년 4월 9일)는 저축 장려용 선전영화였습니다.

도박빚에 허덕이던 주인공이, 약혼녀 가정이 성실히 모은 저축을 통해 위기에서 벗어난다는 극적이면서도 대중적인 스토리와 조선인들의 악습을 고치겠다는 총독부의 문화정치 표어가 잘 맞아떨어진 영화였지요. 물론 윤백남의 탁월한 시나리오 테크닉과 이월화의 뛰어난 연기력을 포함해 이 영화가 한국 영화사의 한 분수령이라는 점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식민지 시기 최초의 극영화가 선전물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후 선전영화들이 계속 쏟아져 나왔으며, 특히 1940년 조선영화령으로 기존의 영화사들이 모두 해체되고 국영 영화사 한곳만 영업하게 된 전시체제 아래서 영화는 조선인들에게 군입대를 강요하는 전쟁선전 일색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식민지 통치자들에게 스크린의 마술이 가져다준 커다란 효과는 대중의 탈(脫)정치화였습니다. 1940년 영화극장의 총관람객 수가 1천2백만명을 넘은 조선에서 영화의 대중적인 마력은 무시 못할 수준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주의적 성향의 지식인들이 "조선의 나이 어린 여자들이 하등의 민족적.계급적 의식 없이 공상적 소부르주아 심리에서 스크린에서 나타나는 미모와 고운 목소리에 유혹된다(김유영, '영화여우 희망하는 신여성군','삼천리', 1932년 10월)"라고 지적할 정도였지요.

성이 대중에게 개방되지 않았던 그 시대에 키스신이나마 구경할 수 있었던 영화는 대중의 성적 욕구를 해소해주는 일종의 분출구이기도 했습니다. 아주 제한적이긴 하나 스크린에서의 선정적 요소를 통해 대중의 우민(愚民)화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모든 문화적 현상과 마찬가지로 영화 또한 헤게모니 창출의 도구인 동시에 기존의 헤게모니를 전복시키는 도구로도 이용될 수 있었습니다. 나운규(1902~37)의 '아리랑'(1926)과 같은 민족영화들은 어떤 신문이나 소설보다 민족의식을 대중화하는 데 크게 공헌했습니다.

당시의 한 비평가는 '아리랑'에 대해 이렇게 평했습니다. "하얀 옷이 영화면에서 펄펄 날린다. 아! 얼마나 가슴이 저리고도 동포애 깊은 동경이냐? …그 찌그러진 초가집, …긴 두루마기 자락을 써늘한 바람에 나부끼면서 일하러 다니는 농촌의 인텔리겐치아 박선생,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네를 부르고 춤추는 신. 이것이 조선에서 조선의 모든 것을 배경으로 하고 우러난 영화이다(승일, '라디오, 스포츠, 키네마', '별건곤', 1926년 1월).

영화 없이는 20세기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만드는 작업은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1926년 6월 필름 검열 부칙이 제정되고 본격적인 영상물 검열의 시대가 열리면서 영화를 헤게모니 전복의 도구로 이용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저항적 요소가 탄압을 받는 동시에 서양 영화들이 조선의 스크린을 정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양 유명 배우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서구적인 미의 기준이 조선인의 미의식을 장악하게 되며, 낭만적이고 극적인 서양의 모습이 대중의 상상 속으로 침투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식민지 시대부터 아닙니까? 영화란 일본의 정치적 헤게모니뿐 아니라 서구의 문화적 헤게모니 성립에도 크게 기여한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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