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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색화 다음은 민중미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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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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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 미술평론가

요즘 1970~9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성취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그 선두에 선 미술이 단색화다. 박서보·정창섭·하종현 등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이 커졌을 뿐 아니라 실제 시장에서도 크게 환영받고 있다. 그 뒤를 이어 민중미술이 새로운 조명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두 미술은 극과 극이라 할 정도로 서로 다른 가치와 조형을 추구했지만 각각 나름의 방식으로 대한민국의 한 시대를 대표하는 미학을 선보였다.

‘리얼리즘의 복권전’

단색화는 추상표현주의·미니멀리즘 등 국제미술의 흐름과 함께하면서도 한국적인 사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이른바 ‘보편과 특수의 통일’을 조화롭게 이룬 미술이라 하겠다. 한국 리얼리즘 미술의 정수라 할 민중미술은 20세기 말 한국 사회 특유의 격동성을 생생히 재현해 주목을 받았다. 당대 세계 미술의 흐름과 관련이 없고 심지어 ‘추하다’는 비판도 들었지만 묵은 장맛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진가가 드러나고 있다. 서울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 현대미술의 눈과 정신 II-리얼리즘의 복권’전(28일까지)에서 우리는 그 장맛을 진하게 체험할 수 있다.

출품 작가는 권순철·신학철·민정기·임옥상·고영훈·황재형·이종구·오치균, 총 여덟 명이다. 리얼리즘 진영에서는 시쳇말로 강호의 고수들이다. 다만 이 가운데 고영훈·오치균은 전통 민중미술 화가라고 하기 어렵다. 민중미술이 리얼리즘 미술이라는 점에서 리얼리즘 계보에 있는 두 탁월한 화가를 함께 포괄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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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광촌 풍경을 생생하게 풀어 온 황재형의 ‘아버지의 자리’. [사진 가나인사아트센터]

민중미술은 태동기부터 상당히 비우호적인 환경에 둘러싸여 있었다. 정치적인 이슈를 날것 그대로 표현했기에 권위주의 정권의 탄압을 피할 수 없었고, 현대미술의 조류와는 거리가 먼, ‘고루한’ 리얼리즘 형식을 지녔기에 화단으로부터 이단아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미술이 정치에 대해 발언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나 리얼리즘이 고루한 형식이라는 생각 모두 편협한 고정관념이다. ‘리얼리즘의 복권’전 출품작이 보여주듯 민중미술은 삶을 진솔하게 이야기하다 보니 정치적 발언을 하게 되었고, 이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하다 보니 리얼리즘 형식을 띠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민중미술은 당대의 국제 조류와는 거리가 있었을지 몰라도 휴머니즘의 보편성을 그 어떤 미술보다 선명하게 드러내 보인 미술이었다. 그것도 한국적인 특수성을 토대로 한 것이니 이 미술 또한 ‘보편과 특수의 통일’을 조화롭게 이룬 미술이라 하겠다.

도록을 영어·중국어 본으로도 만들고 규모 또한 대형인 이번 전시가 시사하듯 우리 화단 일각에서는 단색화에 이어 민중미술을 국제적으로 부각시키려는 노력이 나타나고 있다. 이 두 미술이 그렇게 연이어 부각되는 배경에는 한국인의 저력을 이룬 두 시대정신이 이들 미술에 진하게 반영돼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세계의 조류를 의식하며 한국적인 조형을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단색화에서는 근대화(산업화)의 시대정신이 엿보이고, 권력의 억압에 저항하면서 인권과 민주주의를 부르짖은 민중미술에는 민주화의 시대정신이 담겨 있다. 강력한 시대정신이 지배했던 시기의 미술인 만큼 탄탄한 내공을 보여주는 두 미술이다.

이주헌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