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레한 현실 앞에 선, 빛나던 사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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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호 22면

일러스트 김옥

영화 ‘아메리칸 허슬’의 첫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건 훌렁 벗겨진 대머리에 배가 툭 튀어나온 크리스천 베일의 도드라진 몸 때문이었다(‘배트맨’ 시리즈의 히어로, 바로 그 크리스천 베일 말이다). 그가 플라자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거울을 보며 얼마나 지극 정성으로 자신의 대머리를 감추기 위해 애쓰는지 보여주던 영화의 첫 장면은 그의 과거를 아는 사람에게 허무와 안타까움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만약 소설이었다면 이 장면의 소제목은 이렇게 붙어도 무방하다. ‘당신에게도 곧 일어날 일’.


어떤 글이든 ‘파경’이란 제목이 붙으면 덮어놓고 보는 버릇이 있다. ‘파경’이란 단어의 맞은 편에는 ‘추락’이란 명사가 댓구처럼 붙게 마련인데, 추락에 어울릴 만한 높이감을 획득하려면 그 사람의 과거가 유독 아름답거나 도드라지게 반짝여야 한다. 나는 어떤 종류의 것이든 실패와 추락에 관한 이야기에 사족을 못 쓰는 경향이 있는데, 이유는 하나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 역시 깊었을 것이고, 잃은 것이 있다면 (반드시!) 얻은 것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궁금한 건 얻은 게 아니다. 그가, 혹은 그녀가, 무엇을 잃었느냐 하는 것이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봄날은 가기 마련영화 ‘블루 발레타인’은 우연치 않게 세 번이나 본 영화다. 몇 년 전, 5편의 영화를 동시에 볼 수 있는 홍대의 한 상영관에서 이 영화는 세 번째 상영작이었다. 영화 두 편을 연달아 보고 난 후라 눈이 피로했던 나는 극장을 나와 연달아 커피 두 잔을 마셨다. 막 세 번째 장편 소설이 나온 더운 여름이었다. 2012년, 나는 그 어떤 해보다 독자 행사에서 사랑에 실패한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 소설의 주제이기도 한 ‘상실의 공동체’라는 말의 자장 아래에, 사람들과 사랑과 이별, 사라지거나 무용한 것들에 관한 많은 말들을 나눴다.


결국 사랑이 변하는 건가. 사람이 변하는 건가. 사람들은 진지한 얼굴로 내게 이 질문을 반복해서 던졌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유지태)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말을 던진 이후, 이것이 우리 시대 사랑의 바이블 첫 장 어딘가에 나오는 문장이 됐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그 옛날 ‘봄날이 간다’를 봤을 때, 나는 상우가 하는 말에 대답 대신 대꾸하듯 이렇게 중얼거렸던 것 같다. “사람이 변하는데 어떻게 사랑이 안 변하니?”


‘블루 발렌타인’은 의대생 신디(미셸 윌리엄스)와 이삿짐 센터 직원 딘(라이언 고슬링)의 사랑 이야기다. 문제는 신디가 실수로 헤어진 남자친구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벌어진다. 그녀는 급격한 혼란과 죄책감에 빠진다. 하지만 이들은 헤어지지 않는다. 사랑의 절정은 임신 중절 수술 직전에 아이를 포기할 수 없다고 느낀 신디에게 딘이 “우리 하자. 가족이 되는 거야. 사랑해!”라고 말하는 순간이다.


문제는 신디와 딘의 결혼 그 이후다. 이 영화가 ‘연대기 순’이 아니라는 점은 적어도 주제의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영화의 시작은 이들의 결혼생활이 적어도 4~5년 이상 흐른 이후이고, 그토록 아름답던 딘(정확히 말해 라이언 고슬링의 외모!)이 얼마나 망가졌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컸다는 게 뭐야? 재밌게 못 논다는 뜻이야!” 딘은 (자신의 아이가 아니지만) 어린 딸과 다정히 놀아주는 아빠가 되었다. 잃어버린 개를 찾는 딸에게 “아빠 생각에 메건은 할리우드로 간 거 같아. 동물배우가 되려고 말이지. 워낙 예쁘게 생겼잖아~”라고 말해주는 그런 미국식 아빠 말이다. 하지만 그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남편감은 아니었다. 대책 없는 딘이 사고를 치면, 언제나 생활력 강한 신디가 해결하는 식이었다.


여전히 신디를 사랑하는 딘은 점점 변해가는 아내를 바라보며 괴로워한다. 그는 나름대로 노력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방식이란 정신없이 바쁜 그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교외의 모텔을 예약해 버리는 식이다(그녀는 결국 간호사로 일한다). 딘은 자신의 충동적인 행동이 신디를 얼마나 지치게 하는지 깨닫지 못한다. 게다가 모든 게 ‘지금, 여기, 현재’에 맞춰져 있던 이 남자가 선택한 모텔은 마치 B급 SF영화의 싸구려 세트장처럼 보인다. 그들이 투숙한 모텔 방의 이름은 ‘퓨처 룸(Future Room)’. 하지만 다가올 그들의 미래는 밝아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 제목 앞에 ‘진짜 사랑 이야기(True Love Story)’라는 부제가 붙은 건 그런 이유일 것이다. 이들이 사랑에 빠졌던 시간, 딘이 우쿨렐레를 연주하고, 그 소리에 맞춰 즉흥적으로 탭댄스를 추는 아름다운 신디의 모습은 연인이 서로의 눈을 어떻게 바라보고, 웃을 수 있는지, 어떤 신비로운 움직임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몰락’과 ‘추락’에 대해 말하는 대부분의 작품이 그렇듯, 빛나는 과거와 추레한 현실이 부딪히며 만들어지는 파열음 때문에 보는 내내 괴로운 영화이기도 하다.


딘이 풍성한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뉴욕의 맨해튼 다리를 바라보는 장면에선 우리가 보는 건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하지만 이마가 훌렁 벗겨진 그가 지친 얼굴로 병원에 서 있는 신디에게 고함을 칠 때, 우리가 보는 건 미래에 대한 불안과 절망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죽어가는 과정을 해부한 ‘블루 발렌타인’은 ‘낭만적 사랑과 그 적들’이라는 제목으로도 치환이 가능한 영화다.


누구나 한번쯤은 잘못된 과거로 돌아가 그때 쓴 오답을 깨끗이 지워버리고 싶다는 환상을 꿈꾼다. 그때, 그곳에 나가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의 손을 잡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부탁을 거절했더라면….


어쩌면 영화 속 신디는 진지한 얼굴로 할머니에게 질문하던 바로 그 순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할머니. 사랑에 빠지면 어떻죠? 할아버지는 어땠어요?”


“처음엔 사랑이었겠지. 하지만 날 인간적으로 존중해주진 않았어. 얘야,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조심해야 한단다. 그 남자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아닌지.”


사랑이 죽어가는 과정 해부 … 보는 내내 괴로운 영화네 번째 소설이 나오던 그 해 여름, 사랑과 결혼 사이에서 고민하던 편집자가 내게 어떤 사람과 결혼해야 좋을지를 물었을 때, 나는 농담처럼 이런 말을 했었다. “글쎄. 많고 적고를 떠나서 고정수입이 있는 남자. 그 일이 불법적인 일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서.” 내가 말한 고정수입이란 말은 경제적인 것을 넘어, 부부 공동체로서의 책임감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그것이 제대로 된 답인지는 모르겠다.


딘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신디는 지금쯤 의사가 되어있을까. 생활의 많은 부분을 처리해주는 여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딘은 아침부터 술을 마시며 파트타임 일만 전전하는 허랑방탕한 생활을 청산했을까.


우리는 곧 죽어도 지금 일어나는 일의 진짜 의미를 알 수 없다. 현재를 살라는 의미의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란 어쩌면 나약한 인간이 이 무정하고 불안하기만 한 삶을 감당하기 위해 만든 충직한 조언일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 ‘봄날은 간다’가 결국 ‘봄날은 온다’가 되지 않는 데에는 어떤 삶의 비밀이, 허망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봄은 우리의 예상보다 언제나 짧고, 겨울은 생각보다 그토록 길고 길기 때문에…. ●


백영옥 ?광고쟁이, 서점직원, 기자를 거쳐 지금은 작가. 소설『스타일』『다이어트의 여왕』『아주 보통의 연애』 , 인터뷰집 『다른 남자』 ,산문집『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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