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달의 예술 - 건축

장인 공동체가 살면 도시가 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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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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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현식
건축가·건축사사무소 기오헌

전면 철거의 위기를 넘긴 세운상가에 새로운 기운이 돈다. 전자기술과 예술을 결합해 새로운 예술을 탐색하는 젊은 예술가들이 몰리고 있다. 그들의 작업장은 20㎡쯤이면 족하다. 임대료도 싸다. 전자부품 상점이 즐비해 재료 구하기가 쉽고, 무엇보다 협력할 수 있는 숙련된 기술자도 모여 있다.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세운상가와 파주출판도시

 지난 시대 산업혁명은 과학과 기술이 산업과 적극적으로 협력한 결과물이다. 생산수단을 기계화했을 뿐 아니라 생산과정을 몇 단위로 합리적으로 세분하고, 반복적 과정으로 재조직해 생산시스템 자체를 포디즘이라 일컫는 기계적 체계로 만들었다. 노동은 단순화·동질화되어 노동자들은 그 체계의 부품으로 전락했고, 숙련된 장인은 버려졌고, 그와 함께 장인정신도 사라졌다. 바로 채플린이 그렸던 ‘모던 타임즈’의 풍경이다.

 이러한 근대산업사회에선 거대한 단일공간의 공장, 마천루의 사무실, 고속도로, 철도, 운하 등으로 조직된 유통네트워크가 필요했다. 이에 부응한 도시와 건축은 더 크고, 더 높고, 더 빠른 도시가 선이라는 정량적이고 기계적인 가치관 아래 빠르게 개조됐다. 기능주의로 내용을 채우고 강철과 유리의 기계미학으로 포장해 그것을 유토피아라 했다. 거기에 장인이 머물 곳은 없다.

 후기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상품(물건)’은 사용가치보다 교환가치로 평가되고, 이제는 이미지만 남아 그것이 곧 상품이 되면서 생산체제 역시 소품종 대량생산에서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로 이행하고 있다. 공장의 하이테크보다 숙련된 장인들의 하이터치가 더 절실해지자 버렸던 장인을 다시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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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출판도시의 미메시스아트뮤지엄. [중앙포토]

 이 시대가 요청하는 장인은 단순공정의 숙련공에서 건축가·의사·예술가 등 장인정신이 요구되는 전문직종까지 아우른다. 물질의 질서와 정신의 질서가 같은 것의 다른 표현이듯이 인간의 손과 머리는 하나의 작동이기 때문이다. 장인이 손을 놀리고 도구를 사용하는 동작은 사유의 직관적 도약을 촉발시키며 바로 그 순간 손과 머리의 구분이 없어지고 기술과 예술의 경계 또한 지워진다. 이럴 때 장인의 손은 ‘물건’을 생산만 하는 로봇이 아니라 생각하는 손이며, 문화를 구현하는 손이며, 특정한 생활양식을 창조하는 손이다. 해서 장인들의 작업장은 바로 철학 하는 작업장이며 예술창작실과 다르지 않다.

 장인들은 숙련된 기술을 기반으로 일정 지역에 모여 협력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들이 즐겨 찾는 곳도 작은 공간이 집적(集積)된 장소다. 기존의 도시조직을 조금만 손질해서 다시 쓰거나, 새로 짓더라도 잘게 분절되기를 바란다. 신생도시 파주출판도시가 작은 출판사들에 매력적인 것은 이 때문이다.

 도시에 대한 근대적 사유의 틀을 반성하여 작고, 낮고, 느린 것도 공존케 하여 우리 도시 곳곳에 장인들이 머물 곳을 마련해보자. 그러면 이들 공동체는 큰 기업이 손쓰기 어려운 틈새를 바느질하듯이 잇고 메울 것이다. 거대자본이 지배하는 우리 사회의 기형적 산업구조를 건강하게 재편할 수 있는 역량이 자라날 것이다.

민현식 건축가·건축사사무소 기오헌

약력 : 서울대 건축공학과 졸업. 한예종 명예교수. 작품 ‘한국전통문화학교’ ‘KIST 복합소재연구소’ 등. 저서 『건축에게 시대를 묻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