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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북핵 20년, 왜 아무도 반성하지 않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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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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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북한의 4차 핵실험 후폭풍이 거세다. 미국은 B-52 전략폭격기를 한반도에 전개했고, 한·미 합동군사훈련에 즈음해 핵 잠수함과 핵추진 항공모함을 배치할 것이라는 소식도 들린다. 우리 국방부도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하는 한편 유사시 북한의 핵과 생화학무기, 탄도미사일의 선제 타격을 목표로 하는 ‘4D 파괴 작전(탐지, 교란, 파괴, 방어)’을 조기에 실시한다고 밝혔다. 국제사회에서는 미 연방하원을 필두로 강력한 대북제재 결의안이 줄줄이 채택될 것으로 보인다.

 지당한 조치다. 그러나 뭔가 찜찜하다. 아마도 기시감 때문이리라. 2006년 10월 1차 핵실험 이후 우리는 같은 대응조치를 늘상 지켜봐 왔다. 그러나 그 효과는 과연 무엇이었나. 미국·중국·한국 등 대단한 나라들이, 고립된 실패국가 북한 하나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기묘한 형국이다. 상황이 여기까지 이른 문제의 근원은 분명 북한 체제에 있지만 사실 이는 상수일 따름이다. 지난 20년을 복기해 보면 미국의 실책이나 이를 맹목적으로 따르기에 급급했던 우리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가장 큰 문제는 북한에 대한 정보 실패다. 핵실험 사전 탐지 실패보다 더 심각한 것은 북한의 기술적 능력, 지도부의 전략적 의도,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의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소탄 개발 능력은 아직 미비’ ‘이어지는 고위 인사 탈북으로 미뤄 김정은 체제는 조만간 붕괴할 것’ ‘병진 노선은 북한 종말의 지름길’…. 그간 나왔던 무수한 평가들이야말로 저들의 전략적 의도와 정치적 의지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우리의 프리즘으로 우리 지도부의 구미에 맞게 관련 정보를 재단해 북한을 과소평가하는 우를 낳고 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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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라는 대북 협상 태도 역시 패착의 한 원인이다. 한국과 미국은 줄곧 북한 핵무기의 완전하고도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해체(CVID)를 목표로 삼아 왔다. 이것이 최종 목표라는 사실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협상의 전제조건이 될 수는 없다. 최종 목표로 가는 과정은 점진적이고도 현실적이어야 한다.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핵 시설과 프로그램, 핵 물질의 검증 가능한 폐기부터 협상을 통해 이뤄낸 뒤 핵무기의 완전한 폐기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나 북한 정상국가화와 연동해 진행하는 게 수순이다.

 이와 관련, 북한이 지난해 1월 9일 남긴 제안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북한은 미국이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중지하면 핵실험이나 미사일 및 위성 발사를 유예하는 데 더해 핵물질 생산을 중단할 용의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 미 국무부는 이를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과거 합의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북한은 국제법 준수를 조건으로 (미국과) 흥정하고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납득하기 쉽지 않은 대목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북한의 잘못된 행동에 응징을 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워싱턴의 주류 인사들은 전방위 봉쇄형 압박과 제재를 통해 가공할 만한 고통을 줘야만 북한이 변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악마와도 협상할 수 있다’던 오바마 행정부의 실용주의 외교철학이 유독 이 대목에서만큼은 사라진다. 대신 남는 것은 도덕적 일방주의의 덫뿐이다. 제대로 된 당근의 제시 없이 채찍만 강조하는 가학적 접근 방식을 평양이 수용할 리 만무하다.

 ‘중국만 제재에 적극 동참해 주면 북한이 손들고 나올 것’이라는 ‘중국 외주론’ 역시 북핵 문제를 꼬이게 만든 원인 중 하나다. 1월 8일 화춘잉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북한 핵 문제의 본질적 책임이 미국에 있다’며 중국 책임론 운운은 어불성설이라고 선을 그었다. 호미로도 막을 수 있던 문제를 가래로도 못 막게 된 현재 상태는 미국의 오만과 비협조 때문이라는 게 중국 내부의 대체적인 인식이다. 심지어 대중 견제를 위해 미국이 의도적으로 북핵 문제를 키우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마저 들린다. 중국의 적극적 제재 동참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다.

 결론은 하나다. 도발에 대한 기계적 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미 외부 압박과 제재에 대해 강한 내성을 축적해 온 북한이 고통의 강도 때문에 행태를 바꿀 개연성은 희박하다. 한반도의 공멸을 가져올 군사행동은 더더욱 대안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압박은 가하되 대화와 협상의 여지를 남기는 현실주의적 접근뿐이다. 북한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차선책일지언정 점진적이고 실용주의적인 비핵화의 길을 모색하는 것만이 중국과 러시아까지 끌어들이면서 북한 핵무장이라는 미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시간은 결코 우리 편이 아니다. 지도자의 지혜와 발상의 전환이 절실하다.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