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생명 전하고 하늘나라로 떠난 22개월 '아기천사' 재흥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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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경남 창원에서 4명에게 장기기증을 했던 생후 27개월 주환이(본지 1월 7일자 26면)에 이어 또 다른 ‘아기천사’가 새 생명을 선물하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이번에는 생후 22개월된 남자 아이 길재흥 군이다.

2남1녀의 화목한 집안에서 자라던 재흥이에게 불행이 찾아온 건 지난 7일이었다. 이날 오후 3시30분쯤 재흥이가 가족들과 함께 탄 차가 차량결함으로 인천공항고속도로에 멈춰섰고, 뒤에서 달려오던 광역버스가 운전 부주의로 충돌했다. 이 사고로 뒷자석에 있던 재흥이는 머리와 비장 등에 중상을 입었다. 함께 탑승했던 할머니는 곧바로 숨졌고, 엄마와 11살 누나가 중상을 입고 치료를 받고 있다.

커다란 불행을 피한 건 아빠 길민석(44)씨와 ‘고3’이 된 큰 형 뿐이었다. 길씨는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에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재흥이는 ‘늦둥이’ 아들로 귀여움을 독차지했던데다 16살, 8살 터울의 형 누나와도 잘 지내던 아이였다. 길씨는 지난해까지 7년간 중국에서 회사 주재원으로 일하며 막내를 자주 보지 못 했던터라 더 큰 아쉬움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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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히 인근의 국제성모병원으로 이송된 재흥이는 의료진들의 계속 된 치료에도 상태가 악화됐다.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중상을 입어 뇌부종이 심해지면서 결국 뇌사 상태에 빠졌다.

길민석씨는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는 동시에 재흥이의 회복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했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길씨는 어렵게 장기기증을 결심하고 가족들을 설득했다. 병상에 있던 부인(42)도 좋은 일을 하자는 데 동의했다.

길씨는 "옹알이만 듣고 아직 대화도 제대로 해 보지 못 한 채 아들을 보내 가슴이 너무 아프다. 하지만 우리 천사가 다른 생명을 구하고 하늘나라로 갔으면 좋겠다. 같은 부모의 심정으로 장기기증을 기다리는 엄마 아빠들을 돕고 싶다"면서 눈물의 결정을 내렸다.

길씨는 신장, 폐, 간, 심장 등 재흥이의 장기를 모두 기증할 뜻을 밝혔다. 하지만 안구 기증만은 거절했다. 길씨는 "재흥이가 하늘로 가야하는데 눈이 없으면 어떻게 보고 가겠나. 맑은 눈망울이 떠올라 도저히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결국 재흥이는 14일 새벽 수술대에 올라 가족들과 영원한 작별을 했다. 재흥이의 간과 신장은 2명의 새 생명에게 전달됐다. 길씨는 "장기 크기가 비슷한 다른 아이에게 이식돼 새 생명을 준 것만으로 만족한다. 누군가의 몸 속에서 우리 재흥이 장기가 뛰고 있는 걸로 충분하다"며 위안을 삼았다.

재흥이는 15일 오전 화장터로 옮겨질 예정이다. 지금도 길민석씨에게 전화를 걸면 재흥이의 해맑은 모습을 찍은 사진이 자동으로 화면에 뜬다.

그는 "국내 장기기증 현실이 너무 암울하다. 재흥이가 전한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 많이 알려져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병으로 고통받는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줬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기준으로 국내 뇌사 장기기증자 수는 501명이지만, 2만6000명 이상의 이식 대기자가 여전히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정종훈 기자 sake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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