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면의 실험' 공직사회에 뿌리내리게 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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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면 인사혁신처장이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다. 인사혁신처 직원들에게 남은 연가를 최대한 사용하라고 독려한 것이다.

성탄절 연휴(25~27일)와 신정 연휴(1월 1~3일) 사이에 나흘 동안 연가를 내면 최장 열흘간 쉴 수 있다. 이 처장 스스로 이틀간 연가를 냈다. 일할 때는 일하되 쉴 때는 쉬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는 취지다. 처장이 앞장을 서니 직원들도 눈치를 볼 이유가 없다. 인사혁신처 직원 중 10일 이상 쉬는 직원이 72명이나 된다고 한다.

삼성그룹 출신의 이 처장은 ‘철밥통’으로 불리는 보수적인 공직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연공서열 대신 직무와 성과 중심으로 보수를 주는 임금체계 개편안이다. 성과가 미흡한 공무원은 보수를 동결하되 최상위 2% 성과 우수자에겐 특별성과급을 지급한다. 또 보직과 업무의 중요성·난이도에 따라 보수를 달리하겠다는 것
이다.

인사혁신처는 민간 경력자 채용을 5급에서 7급으로 확대했다. 5급 공채와 민간경력자 채용 비율을 2017년까지 5대 5로 맞춘다는 계획이다. 이미 헤드헌팅, 민간 스카우트, 국민추천제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많은 민간 전문가가 공직사회로 영입되고 있다. 이대로 가면 배타적인 순혈주의에 안주해온 공직사회에 상당한 변화의 물결이 닥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시
험 위주의 공무원 채용제도로는 급변하는 사회에 맞춘 신속하고 유연한 정책 개발·시행이 어렵다는 지적이 많았다. 공무원의 개방화, 전문화, 성과주의는 뒤늦었지만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 반드시 가야할 바람직한 방향이다. 하지만 이를 일관되게 추진하는 데는 걸림돌이 만만치 않다. 기존 공무원 사회는 벌써부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류영록 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은 “성과연봉제는 공무원 가족의 생명줄인 보수를 갖고 공무원들을 옥죄겠다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역대 정부가 공무원 사회를 혁신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공직사회는 별로 바뀌지 않았다. 큰일이 터질 때마다 ‘복지부동(伏地不動)’ ‘무사안일’로 상징되는 폐습이 나타나고 있다. 오히려 갈수록 사명감을 갖고 창의적으로 일하려는 공직자를 찾아보기 힘들어지는 것 같다.

기업이든 국가든 혁신을 하려면 적절한 평가와 보상이 따라줘야 한다. 일을 안 하면서 돈은 똑같이 받으려는 ‘나눠 먹기’식 관행을 그대로 둬서는 공직사회의 변화는 요원하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야말로 이근면 처장의 개혁 시도가 계획대로 추진돼 공직사회에 뿌리내리는 계기가 돼야 한다. 정권 후반 공무원들의 부작위(不作爲)식 저항에 휘둘려 혁신이 흐지부지되는 전철을 더 이상 되풀이해선 안 된다.

세계 최고로 평가받는 싱가포르 공무원들은 높은 수준의 보수를 받는다. 직급·호봉이 아니라 능력·성과에 따라 승진과 보상이 결정된다. 능력만 있으면 30대에 국장과 차관이 되는 사례도 흔하다. 민간기업에서 탐내는 인재들이 싱가포르 정부에서 일을 하는 이유다.

눈치를 보지 않는 자율적인 연차 사용, 성과급 도입 등 ‘이근면의 정책’ 중에는 젊고 능력 있는 공무원들이 오히려 좋아할 부분도 많다. 의욕 있는 공무원들에겐 사기를 올려주는 인센티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나라도 큰 성과를 내면 보수를 많이 받는 공무원이 나와야 한다. 이래야 민간의 뛰어난 인재를 영입할 수 있고 공직사회에 청렴 의무를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