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십자군전쟁 무대 '킹덤 오브 헤븐' 주연 올란도 블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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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긴 금발을 휘날리며 활을 쏘던 미소년은 사라졌다. 대신 검게 탄 얼굴에 거칠게 자란 수염, 땀에 엉킨 검은 곱슬 머리를 한 기사가 서 있었다. ‘반지의 제왕’에서 요정 레골라스 역을 맡아 스타덤에 오른 올란도 블룸(28). 이번엔 중세 십자군 전쟁을 그린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 5월 4일 국내 개봉)’의 주인공인 기사 발리안으로 돌아왔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2002년작 ‘블랙 호크 다운’에서 전쟁에 처음 참가하는 풋내기 병사 역을 맡았던 올란도가 같은 감독의 새 작품에서 3년 만에 영웅으로 변신한 것이다.

▶ "킹덤 오브 헤븐"의 전투 장면. 올란도 블룸은 "이 영화를 위해 소년에서 남자로 변신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LA 인근 파사네다 리츠 칼튼 호텔에서 만난 올란도 블룸은 "배역을 딴 뒤 몸 만들기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미소년 이미지에서 벗어나 남자로, 영웅으로 변신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여전히 울퉁불퉁하고 거친 영웅과는 거리가 멀다. "올란도가 주저하는 영웅(reluctant hero)을 잘 나타내는 인물이라 주저하지 않고 캐스팅했다"는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12세기 제 2, 3차 십자군 원정 사이에 있었던 10년 가량의 짧은 휴전기가 배경이다. 대장장이 발리안은 생부인 기사 고프리(리암 니슨)의 뒤를 이어 평화를 유지하려는 국왕 볼드윈 4세(에드워드 노튼)의 뜻을 받든다. 그러나 국왕의 세력이 기울고 교회 기사단이 득세하면서 예루살렘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발리안은 사랑하는 여인 시빌라 공주(에바 그린)의 부탁을 받고 전쟁의 한가운데에 뛰어들게 된다.

여느 영화와 마찬가지로 새까맣게 쏟아지는 화살은 유독 그를 피해 가긴 한다. 심지어 주인공의 아버지인 기사 고프리도 영화 초반부에 화살을 맞고 허무하게 죽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적을 쓰러뜨리며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영웅을 상상하면 안 된다. 그는 요정이 아니라 발을 땅에 딛고 선 인간이었다. 올란도는 "발리안은 현실적인 영웅"이라고 설명한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지키려는 건 성벽이 아니라 백성입니다. 신의 왕국이란 이상향도 결국 사람의 머리와 가슴에 있다는 것, 그걸 지키려면 정의로운 행동을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죠."

영화 밖에서는 더 약한 인간인 그는 "약간 다치기도 했고, 모래 사막에서 독감에 걸려 고생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모래 사막 한가운데서 시공을 초월해 모든 게 연결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촬영이 모두 끝난 지금이지만, 그는 영화의 주제 의식에 푹 빠져 있었다.

"영화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전쟁을 선과 악의 대결 구도로 몰지 않습니다. 얼마 전 U2의 콘서트에 갔는데 종교.인종.문화.성별 등을 떠나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는 걸 모토로 삼고 있어서 놀랐습니다. 1948년 국제연합총회에서 채택한 세계인권선언에서도 인간은 모두 동등하다고 규정했듯, 정의로운 행동도 결국 서로 존중하는 데서 출발하는 게 아닐까요."

세계인권선언의 채택 연도까지 기억하는 그는 "배움을 갈구하기 때문에 늘 책을 읽는다"고 말했다. 음악도 떼어 놓지 않는다고.

"5~6개월 연기 학교에 다니다가 갑자기 영화에 출연하고 결국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건 큰 축복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도 배우는 배우입니다."

LA=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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