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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생 옥탑방서 투신 … “수저 색깔이 생존 결정” 유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스무 살의 서울대 재학생이 장문의 유서를 남기고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서울 관악경찰서는 “서울대 생명과학부에 재학 중인 A씨(20)가 18일 오전 3시쯤 거주하던 신림동 옥탑방 건물에서 투신해 숨졌다”고 이날 밝혔다. A씨의 친구들이 경찰에 신고해 구조대원이 출동했지만 이미 메탄올을 사과즙에 섞어 마시고 투신한 뒤였다. 구급차에 실려간 A씨는 병원 도착 직후 후두부(머리 뒤편)의 출혈로 숨졌다.

과학고 조기졸업, 대학 전액 장학금
부모 교수·교사 … 가정 형편 안 나빠
평소 우울증, 죽고 싶다는 말 자주 해
심리 전문가 “성취 압박 시달린 듯”

 그는 투신 전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린 유서에서 네티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 ‘수저론’을 언급하며 세상을 비판했다. 이는 부모의 재력에 따라 금수저·흙수저 등으로 계급이 나뉜다는 젊은 층의 자괴적 표현이다. A씨는 “서로 수저 색을 논하는 세상에서 나는 독야청청 ‘금전두엽’을 가진 듯했다. 하지만 생존을 결정하는 건 전두엽 색깔이 아닌 수저 색깔”이라고 적었다. 이어 “먼저 태어난 자, 가진 자, 힘 있는 자의 논리에 굴복하는 것이 이 사회의 합리다. 저와는 너무도 다른 이 세상에서 버티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했다.

 유서 내용과는 달리 A씨는 아버지가 대학 교수를 지냈고 어머니가 중학교 교사라서 경제적 형편이 나쁘지는 않았다고 한다.

 서울 지역의 과학고를 조기졸업하고 지난해 서울대에 입학한 그는 전액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성적도 뛰어난 편이었다. 대학 입학 후 학보사 기자로도 활동했다. ‘모범 선배’로 선정돼 출신 고등학교 후배들을 대상으로 특강도 했다.

 최근엔 약학대학입문자격시험(PEET)에 응시해 합격선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A씨의 친구는 “그의 옥탑방을 ‘복덕방’이라고 부를 정도로 자주 놀러 갔다. 지난달 24일에도 과학고 동기 몇 명과 옥탑방에서 술을 마셨다”고 전했다. 지난 14일엔 친구들과 동해안으로 이틀간 여행을 다녀왔다.

 그랬던 A씨가 투신한 이유는 뭘까. 지인들은 그가 대학 시절 내내 우울증을 앓았다고 했다. 평소 박카스 병에 메탄올을 가득 채워 넣고 다니며 “힘들 때 마시려고 갖고 다닌다”고 자살을 암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A씨는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 등에 삶의 허무함이나 자살을 암시하는 글을 자주 올렸다. A씨의 같은 학과 친구는 “지난 1년여간 ‘죽고 싶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A씨의 아버지는 “아들이 옥탑방에 산 것은 자취를 경험해 보고 싶다고 해서 허락한 것”이라며 “아들은 전형적인 모범생으로 공부 욕심이 많았는데 최근 우울증이 악화된 것 같다”고 말했다.

 A씨가 평소 모든 일에서 뛰어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A씨는 과학고를 조기졸업하고 대학 2학년임에도 3학년 이수 학점을 조기에 땄다고 한다. 이나미 심리분석연구원장은 “학업 등에서 뛰어난 성적을 보이는 학생이라도 작은 스트레스와 압박감에 불안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며 “늘 잘해 내야 한다는 부담과 우울증이 겹쳐 스트레스와 무기력증이 악화되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경찰은 유족과 친구들을 상대로 A씨의 우울증 병력과 사망 원인 등을 조사하고 있다.

손국희 기자, 김필준·송승환 예비기자 9k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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