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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뉴욕 그리고 서울 … 휠체어 여행책 만드는 하버드대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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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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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하반신 마비가 된 김건호씨는 내년 6월 장애인의 시각으로 만든 서울 여행 가이드북을 펴낼 예정이다. 그는 “맛집 등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책을 만들겠다”고 했다. [최영권 인턴기자]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LA), 라스베이거스, 그랜드캐년, 뉴욕 그리고 서울. 하버드대 정치학부 2학년 김건호(22)씨가 지난해 여름부터 휠체어를 타고 누벼온 여정이다. 그 과정에서 주요 관광지·호텔·관공서 등을 직접 방문하고 각 도시의 장애인 접근성을 꼼꼼히 기록하고 평가했다. 지난 10월 미국 20개주의 장애인용 무료 여행 가이드북을 펴내 온라인에 공개하기도 했다. 현재는 내년 6월 완성을 목표로 ‘서울판’ 여행책을 제작하고 있다.

김건호씨 지난해 여름부터 투어
장애인 접근성 평가해 정보 제공
“서울엔 맛집 많아 안내 꼭 넣을 것”
경복궁은 돌길이라 불편 지적도

 “장애는 그냥 장애일 뿐이니까 ‘쿨’하고 재미있게 만들어보자고 생각했죠.”

 지난달 26일 만난 김씨의 얼굴엔 장난기 섞인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는 5년 전 미국에서 스키를 타다가 사고를 당해 하반신이 마비됐다. 그래도 “몸이 불편한 건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쿨’한 청년의 여정은 우연히 시작됐다. 그는 “지난해 초 미국 여행을 하다 장애인용 시설이 많긴 한데 어디에 있고,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정보가 부족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곧바로 그해 여름방학을 활용해 미국을 횡단하며 유명 도시들을 직접 점검하기로 계획을 짰다. ‘유튜브’에는 모금 동영상을 올려 여행책 제작을 위한 후원자 찾기에도 나섰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대학 친구들은 “취직 준비하고 경력 쌓기도 바쁜데 왜 이런 일을 하느냐”며 걱정했고, 가족들도 반대했다. 하지만 그의 도전을 응원해준 건 뜻밖의 인물이었다. 도널드 피스터 하버드대 학부 담당 학장이 김씨의 유튜브 동영상을 보고 학교 구성원들에게 e-메일을 보내 사연을 소개했다. 그런 덕분에 하루 아침에 유명인사가 됐다. 그는 “생각지도 못한 도움 덕택에 주변의 생각이 바뀌고 후원자도 생기면서 여행에 나설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7~8월 한국계인 브래드 류 등 친구 3명이 교대로 차를 운전하면서 사진과 동영상을 찍고 김씨가 본인 체험을 글로 썼다. 이렇게 해 가이드북 인쇄본 1000부를 완성했고, 이달말까지 온라인 신청을 받아 나눠줄 예정이다.

 첫번째 도전을 마친 김씨는 시선을 모국으로 돌렸다. 올 하반기 휴학을 하고 강남역, 광화문 등 서울 곳곳을 기록하고 있다. 장애인에게 생생한 정보를 주겠다는 목표는 미국판과 똑같지만 다른 점이 딱 하나 있다.

 “제가 맛집을 너무 좋아해서 서울판에는 하동관·명동교자처럼 오래된 유명 음식점을 꼭 넣고 싶어요.” 그는 휠체어를 타고도 종로, 을지로 등에서 훌륭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 한다. 그래서 출입구의 경사가 높거나 크기가 좁은 가게도 마다하지 않고 휠체어를 몰고 달려간다.

 김씨가 서울에 내린 중간평가는 어떨까. 지하철의 경우 장애인용 엘리베이터 등 편의시설이 미국보다 좋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이에 비해 버스는 장애인이 탈 수 있는 저상버스 수가 적은데다 언제 올 지 모른다는 점을 지적했다. 가장 안타깝게 여기는 곳은 고궁이다. 그는 “경복궁 등은 너무 아름답지만 돌길로 만들어진 내부에 들어가기 어려워 경치를 볼 수 없는 바깥쪽만 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음 여행지도 이미 생각해뒀다. 중·고교 시절을 보낸 베트남 호치민이다. “힘이 될 때까지 세계를 누비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읽는 여행책을 만들고 싶다. 유럽편 제작도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정종훈 기자, 오진주 인턴기자 sake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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