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골목엔 가족이 있었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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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보는 남자] 그 시절, 골목엔 가족이 있었네
응답하라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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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의 대장정은 ‘응답하라 1997’(2012, tvN, 이하 ‘응칠’)이 첫 방영되면서 시작됐다. ‘응칠’이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두고, ‘응답하라 1994’(2013, tvN)는 케이블 드라마의 시청률 역사를 새로 쓰는 ‘킬러 콘텐츠’로 등극했다. 문화 소비층의 핵심인 20대 후반부터 40대의 추억이라는 감성에 호소한 이 시리즈는 국민 드라마라 불릴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

시리즈의 세 번째 시즌이 1988년을 배경으로 제작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우려하는 사람이 적잖았다. 88년은 주 시청자층이 소비하기엔 너무 먼 과거가 아니냐는 걱정부터, 여주인공으로 캐스팅 된 아이돌 그룹 걸스데이의 혜리는 부적합하다는 불만과 원성까지 들렸다. 하지만 ‘응답하라 1988’(방영 중, tvN, 이하 ‘응팔’)은 이런 우려를 다시 한 번 열렬한 환호로 바꿔놓았다. ‘응팔’의 힘은 의외로 가장 익숙하고 보편적인 곳에서 솟아났다. 바로 ‘가족’이란 울타리 안이다.

‘응팔’은 쌍문동 골목이 단순한 배경이 아닌 청춘의 보금자리로 기능하는 가족 드라마에 가깝다. 같은 골목에서 자라난 다섯 친구들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조밀하게 펼쳐내는 것. 회당 무려 90여 분에 달하는데도 지루할 틈이 없다. 역시 추억은 힘은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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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지난 두 시즌과 비교해 두드러지는 점은 성동일과 이일화 부부에 국한됐던 어른들의 이야기가 전면에 부각됐다는 것이다. 부모 세대가 젊은 출연자들의 조연 역할에 그치고 마는 기존 드라마와 달리, 이 드라마의 부모 출연진은 합당한 분량과 농익은 관록으로 다소 낯선 얼굴의 젊은 연기자들과 최상의 호흡을 보여준다.

지난 5회 방영분은 ‘월동 준비’라는 타이틀로 세 엄마의 이야기를 다뤘다.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엄마를 만들었다’는 내레이션과 함께 한 회의 대부분을 엄마들의 이야기에 할애해 감동과 극적인 재미를 동시에 선사했다. 특히 엄마와 아들, 엄마와 딸, 엄마와 엄마라는 가족 내 다양한 관계를 두루 살피며 이야기의 연결고리를 촘촘하게 엮어낸 점이 빛났다. 이우정 작가의 구성력은 감탄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극 중 선우(고경표) 엄마 역할을 맡고 있는 연극 배우 출신의 김선영에게 온당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진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의 캐스팅은 다른 드라마와 비교하면 모험에 가깝다. 이에 응답하듯, 김선영은 스치는 ‘신스틸러’가 아닌 이야기의 주인으로 명불허전의 연기를 보여주었다.

출생의 비밀과 핏줄 간의 전쟁으로 점철된 다른 드라마와 달리, 가족의 범주를 이웃으로 넓히며 따뜻한 공동체의 판타지를 실현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응팔’은 가족주의의 순기능을 극적인 구성을 통해 구현한다. 그리고 ‘골목은 그저 시간만으로도 친구를 만든다’는 극 중 내레이션처럼, 같은 시공간을 공유한 이들이 주고받는 인심이 성장의 양분임을 깨닫게 한다. 까칠하기 이를 데 없는 보라(류혜영)는 급히 지방에 내려가야 하는 선우 엄마를 위해 그와 데면데면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늦은 밤, 손수 차를 운전해 선우 엄마를 데려다 준다. 부모님들은 경기에 패한 프로 바둑기사 택(박보검)에게 얼굴 한가득 안쓰러움과 기특함을 담아 그의 어깨를 다독인다. 골목의 식구 모두가 마치 가족 사진을 찍듯 환하게 웃고 있는 이 드라마의 포스터처럼, ‘응팔’은 우리가 살고 있는 가장 작은 나라는 ‘가족’임을 보여준다. 청춘 드라마의 건강한 쾌활함으로 출발해 가족과 이웃까지 보듬으며 자장을 넓히고 있는 ‘응팔’. 이 시리즈의 행보는 관계의 소중함을 돌아보게 하고 우리의 일상 자체가 매일 쓰이는 성장 드라마임을 깨닫게 한다. ‘응답하라’ 시리즈에 진심의 응원으로 응답한다.

글= 진명현. 노트북으로 드라마, 예능, 다큐멘터리 등 장르 불문하고 동영상을 다운받아 보는 남자. 영화사 ‘무브먼트’ 대표. 애잔함이라는 정서에 취하면 헤어나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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