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걱정만 할 건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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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6호 18면

최근 눈을 뗄 수 없는 지표 가운데 기업 매출이 있다. 지난해 제조업 매출증가율 -1.6%를 포함, 전 산업 매출이 불과 1.3% 늘어난 데 그쳤다. 올해는 전 산업 기준으로도 상반기 -4.5%에 이어 연간으로 마이너스 증가율을 기록할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 조선·전자·철강·화학 등 원자재 관련 업종의 부진이 두드러졌다. 기업의 매출실적이 물량 기준이 아니고 부가가치도 아니어서 국민계정과는 거리가 있지만, 가장 체감으로 알기 쉽게 경제상황을 말해주는 지표로 볼 수 있다. 유가 하락과 같이 매출규모를 줄이는 요인도 있지만 지난해의 마이너스성장이 증폭돼 나타나는 것은 상황의 심각성을 말해준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닮아가는 한국기업활동과 경제규모의 축소는 과거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경험, 즉 ‘일본화’ 우려를 일깨워준다. 일본화를 혹독한 성장저하와 기업의 역성장, 사회 전반의 무기력화로 요약한다면, 현재 한국의 상황이 일본화에 상당히 근접했거나 초기단계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인구증가율에 명목성장률 역시 추세뿐 아니라 크기까지 20년 시차를 두고 거의 정확히 일본을 따라가고 있다. 우리 경제의 고성장을 가져온 추격모델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일러스트 강일구

그간 글로벌 경쟁에서 우위를 점해 온 조선·철강 등 전통산업이 빠르게 퇴조하고 있지만 이를 대체할 새로운 혁신과 성장동력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올해(1~10월) 수출 상위 10대 품목을 보면 2006년과 비교해 5위에 있던 컴퓨터 대신 플라스틱제품이 10위로 턱걸이해 들어왔을 뿐 반도체·자동차·휴대폰 등이 맨 위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10년 전이나 같다. 투자정보업체인 다우존스가 선정하는 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의 스타트업 기업(유니콘) 132개 가운데 한국 기업은 단 두 개만이 들어가 있어 중국(19개), 인도(6개)에 비해 ICT 서비스를 중심으로 한 혁신에서도 크게 뒤처지는 모습이다.


더 큰 문제는 한국이 일본보다도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먼저, 성장과 교역 등 세계경제 여건에서 우리가 훨씬 불리하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동안에는 IT호황과 신흥국 고성장, 선진국 자산버블 등으로 세계경기가 좋았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신흥국 경제의 좌초로 세계경제 성장세가 부진한데다 선진국의 수요회복 미진, 리쇼어링 확산과 신흥국경제의 자립화 진전에 따른 글로벌 분업 둔화 등으로 교역증가세가 크게 낮아지고 있다.


잃어버린 20년 동안 세계교역이 연평균 6.1% 늘었지만 최근 3년간은 3.2% 증가에 불과하다. 여기에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수출 비중이 일본의 4~5배에 달할 정도로 무역의존도가 높아 세계경제 환경 악화의 영향도 더 클 수밖에 없다. 경쟁의 관점에서도 일본보다 어렵다. 일본이 한국과 대만 등 추격자들에 쫓겼다면 우리는 중국의 추격·추월로 경쟁력과 시장을 잃어가고 있다. 한국 기업들이 중국 제조업의 외주생산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경고가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경쟁의 양상은 판이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일본의 소재·부품처럼 넘볼 수 없는 경쟁력을 지닌 분야가 있는 것도 아니다.


세계 경제 여건에서 한국이 더 불리돌이켜보면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기업의 매출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이번의 경우 리먼사태와 같은 엄청난 충격이 없는 가운데 기업매출이 줄어 더욱 고민을 깊게 하고 있다. 중소기업에 비해 대기업의 매출이 더 악화하고 있다는 점도 세계경제의 구조변화에 따른 수출악화가 반영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경험한 두 번의 위기가 급성 병이었다면 이번의 위기는 서서히 몸을 망가뜨리는 병이다. 그렇다고 해서 뚜렷한 처방도 없는 만성질환이라 할 수 있다. 앞선 위기는 외환부문이 건전하지 않고 기업들이 과잉투자하는 등 상대적으로 일시적 성격의 문제에 기인한 것이었다. 경쟁력 저하와 같은 근본적 문제가 아니었기에 최악의 상황이 지나가면 곧바로 경제가 회복되리라는 믿음이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아직도 미국 금리인상이 한국 경제를 둘러싼 가장 큰 리스크로 지목되고, 부진한 경기를 재정으로 대응할 것인가 통화정책으로 할 것인가에 논의가 집중된다면 상황인식이 잘못되거나 쉬운 것만 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일본화 초기 일본 역시 위기 인식과 대응이 상당히 늦었다. 일본 정부는 구조 개혁에도, 과감한 부양에도 실패했고 기업은 기업대로 성공체험에 빠져 십 수년이 지난 글로벌 금융위기 때에서야 비로소 심각성을 깨달았다. 다행히 한국의 경우 경제와 기업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많아 보인다. 문제는 실행이다.


신민영?LG경제연구원 경제연구부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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