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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간 한국 춤바람 전통과 현대의 조화로 관심 집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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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5호 16면

2015 칸 댄스 페스티벌 개막을 장식한 국립무용단의 ‘회오리’

한불수교 130주년을 맞은 올해 프랑스에서는 한국 예술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지난 9월 18일 국립국악원의 ‘종묘제례악’이 한불상호교류의 해 공식 개막작으로 국립 샤이오극장에 올랐고 파리가을축제도 안숙선 명창, 진은숙 작곡가 등 한국 아티스트들을 다수 초청했다. 루브르박물관 옆 국립장식미술관에서는 우리 공예·디자인을 총망라한 ‘코리아 나우’ 전시가 한창이다.


특히 무용 분야의 진출이 러시다. 전통 궁중무용의 진수인 종묘제례악을 시작으로 9~10월 엔 현대무용가 안은미가 ‘현대무용의 성지’로 꼽히는 파리 테아트르 드 라 빌 등 4개 극장에서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 등 3부작을 올렸고, 국립현대무용단의 ‘이미아직’도 2016년 샤이오극장 공식 초청작으로 선정됐다.


유럽에서 유례없는 ‘한국 춤바람’이 불고 있는 지금, 과연 저들이 인식하는 ‘한국 춤’이란 어떤 것일까. 고유함으로 승부하는 전통 무용도 아니고 국적을 초월한 현대 무용도 아닌, ‘시대와 함께 숨쉬는 한국 무용’을 추구하는 국립무용단의 행보가 주목되는 이유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무용축제인 칸 댄스페스티벌에 한국 무용단 최초로 초청돼 개막작으로 ‘회오리(VORTEX)’를 선보였다. 페스티벌 개막 1주일 전 발생한 파리 테러로 프랑스 전역의 공연장 분위기가 얼어붙은 상황이었지만 ‘회오리’는 살아있었다. 무상한 인생을 위로하는 한바탕 제의와도 같은 숭고한 무대를 향한 현장의 열기도 뜨거웠다.


20일 오후. 영화제로 유명한 프랑스 남부도시 칸은 해안도로를 비롯해 시내 상점가 등 거리 곳곳이 국립무용단원 장윤나의 우아한 춤사위를 담은 ‘회오리’ 포스터로 도배돼 있었다. 파리 테러 이후 일부 극장들이 잠정 폐쇄되고 문화계 각종 행사들이 취소됐지만, 칸 댄스 페스티벌 개막은 예정대로 진행됐다.


‘회오리’는 칸 영화제의 메인 행사장으로 사용되는 ‘팔레 데 페스티벌(Palais des Festivals)’의 2309석 규모 대형 공연장인 루이 뤼미에르 극장에 올랐다. 극장 입구에서 소지품 검색이 있었지만 관객 입장에 무리는 없었고, 공연 시작 전 로비는 10대 소녀들부터 휠체어를 탄 노인들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으로 가득 찼다. 테러 전 80% 이상 예매됐던 티켓이 취소도 많이 됐지만, 현장 판매로 1층 객석이 전석 매진되고 예정에 없던 2층 객석까지 오픈할 정도로 성황이었다. 칸의 무용학교 직원 셀린은 “학교 출신 무용수 여럿과 함께 왔다”며 “테러 위협에도 공연을 보는 게 당연하다. 무용을 하면서 투쟁 정신을 보여주는 거다. 일요일에도 70명의 학생이 축제를 위한 플래시몹 행사를 연다”고 했다.

“‘회오리’의 강점은 움직이는 전통” ‘회오리’는 지난해 핀란드 안무가 테로 사리넨의 안무로 첫 선을 보였다. 세계적인 안무가와 국립무용단의 첫 만남으로 세계 무용계의 주목을 받았고, 칸 댄스페스티벌 예술감독 브리짓 르페브르가 국립극장(극장장 안호상)측에 먼저 개막작으로 제안을 해 왔다. 페스티벌 측이 체재비 등 모든 비용을 부담하고 개런티 3만 유로(약 3800만원)까지 지불하는 유례없는 조건으로 명실공히 한국 무용을 ‘수출’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1995년부터 파리오페라발레단 단장을 20년간 역임한 세계 무용계의 거장 르페브르가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첫 해라 세계 무용계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 개막작으로 초청된 국립무용단은 세계 진출의 활주로에 오른 셈이다. 공연 직전 무대에 오른 르페브르는 “최대한 열린 무용제로 만들고 싶었다. ‘회오리’는 한국의 전통춤이지만 현대성을 바라보는 ‘움직이는 전통’이고, 이번 무용제 테마도 ‘움직이는 전통’이다”라고 소개했다.


막이 오르자 국립무용단원 19명은 몸으로 거대한 제사를 올리는 듯했다. 동서양을 초월한 태고와 자연, 생명의 순환을 상징하는 움직임은 국악기가 신비하게 어우러진 영적인 음악, 구음을 내는 소리꾼과 함께 가무악이 하나 된 무대를 만들어 갔다. 쥘부채의 이미지와 소리를 적용한 의상, 살풀이 수건과 방울소리 등 디테일도 전통춤을 오마주하면서 절제된 모던함을 어필했다.


전통 춤과 닮은 듯 다른 춤사위는 ‘조류(潮流)’와 ‘전승’, 부활과 전진의 ‘회오리’로 나아가며 기운을 상승시켜 갔다. 물결치듯 넘실대는 군무의 에너지는 땅 속에서 끌어올린 기운으로 태풍의 에너지라도 만들어 낼 듯 강렬했다. 고요함 속에 내재된 에너지로 극장 전체를 서서히 달군 폭발 직전의 상태에서 샤먼 역 무용수 송설의 독무로 막이 닫히자 80분 내내 숨죽였던 객석에 비로소 브라보가 터지고, 기립박수와 환호가 이어졌다.


순환하는 삶과 죽음에 바쳐진 제의와도 같았던 무대는 테러로 상처입은 프랑스인들의 마음에도 가닿았던 것일까. 무용 공연을 처음 봤다는 60대 관객 마르틴은 “너무 멋있었다. 피날레가 굉장했는데 점점 상승해가는 느낌이 테러 이후에도 계속 살아가야 할 우리에게 활력을 주는 듯했다”고 감격했다. 안무가 제프는 “굉장한 에너지와 인간성이 느껴졌다. 동양 무용수들이 서양식 안무를 한국식 동작으로 소화해내는 것이 흥미로웠고 낯선 악기를 사용한 음악도 멋졌다”며 감탄을 연발했다. 무용학교에서 단체 관람을 왔다는 33명의 어린이들도 “한국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아주 좋았고 아시아 음악이 독특했다”고 입을 모았다.


‘현대화된 전통’은 전통 자체에 대한 호기심도 부추겼다. 일간지 무용담당 기자 파스칼은 “굉장히 풍부하다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전통과 현대의 만남을 강조하는데 나는 테로 스타일은 알지만 한국 전통춤은 모른다. 당신네 전통이 뭔지 궁금해졌다”고 관심을 보였다.

칸 댄스 페스티벌 1984년 시작돼 1993년 격년제로 전환, 올해로 20회를 맞은 대표적인 국제무용제다. 윌리엄 포사이드·마기 마랭·안느 테레사 드 키어르스 마커 등 당대 최고의 무용가들이 거쳐가며 무용계 최신 흐름을 볼 수 있는 행사로 정평이 났다. 올해는 11월 20일부터 29일까지 열흘간 현대무용사에 한 획을 그은 크리스티앙 리조의 신작 ‘ad noctum’을 비롯해 브라질의 데보라 콜거 무용단 등 총 16개 단체가 페스티벌과 공동제작한 19개 작품을 선보였다.

메인 행사장 팔레 데 페스티벌 건물 정면을 ‘회오리’ 포스터가 차지했다.

“한국 춤은 희망으로 추는 춤” 이런 관심에 화답하듯 공연 다음날인 21일 한국 전통무용 마스터클래스가 극장 내 스튜디오에서 열렸다. 우리 춤사위에 매료된 르페브르 예술감독이 특별히 요청한 프로그램이다. 대표적인 전통춤 ‘동래학춤’과 ‘태평무’의 시연과 동래학춤 실습이 이어졌다. 국립무용단원 조재혁과 박혜지가 직접 지도에 나섰고, 참가자 24명과 학자 총 50여 명이 2시간 넘게 동래학춤을 집중탐구했다.


‘정중동’ ‘굿거리장단’ ‘추임새’ 등 통역조차 어려운 개념에 참가자들은 잠시 당황했지만, 엉거주춤 따라하다 ‘스스로 새가 되라’는 한마디에 이내 해방됐다. 조재혁이 “우리 춤의 특징이 즉흥과 자유다. 기본 동작을 응용해 마음대로 학이 된 것처럼 춤을 추라. 음악은 안에 있다. 내면에 집중하라”고 주문하자 그들은 정말 순식간에 수십 마리 학이 됐다. 푸득푸득 날다 내려앉아 모이를 찾고 다시 훨훨 먼 곳을 향해 날아가는 여유로운 춤사위가 서양인들에게도 제법 어울렸다. “한국 춤은 흥과 신명이다. 심각할 필요 없고, 맞고 틀리고도 없다. 더 즐겁게 살고 싶은 희망으로 추는 춤”이라고 하자 “얼씨구 좋다”는 추임새까지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참가자 가운데 청일점으로 가장 신들린 날갯짓을 구사하던 청년 에두아르는 조재혁에게 다가가 “오래전부터 내면을 표현하는 춤을 추고 싶어 찾고 있었는데 오늘 드디어 비슷한 걸 찾았다”며 감사를 전했다. 웰빙 카운슬러로 일하며 아마추어로 춤을 추고 있다는 그는 “감각을 열어놓고 배우니 낯선 동작들도 어렵지 않았다. 공연을 위한 무브먼트 리서치를 이어가겠다”며 “꼭 한국에 와서 더 배워가겠다”고 했다. ●


칸(프랑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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