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좀 가게 빨리 끝내라 졸랐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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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여름. 대구 경북체고 2학년에 재학 중이던 한 여자 펜싱선수가 도망을 쳤다. 미치도록 축구가 하고 싶었던 그녀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여고 축구부가 있던 강릉의 강일여고로 가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테스트 현장에서 그녀는 "이 정도로 기본기가 갖춰진 여자 선수는 처음 본다"는 찬사를 받았다.

경북 울진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릴 적부터 오빠들과 논에서 공차기를 즐겼다. 경북체육중.고에서 펜싱 플뢰레 선수로 뛰면서도 축구를 워낙 좋아해 혼자 드리블.리프팅 기술을 연마했다.

강일여고 축구부에 들어간 지 1주일 만에 그녀는 국가대표로 선발됐고,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뛰었다. 필드하키.육상.핸드볼 선수들로 급조한 국가대표팀에서 '축구를 할 줄 아는'그녀를 탐낸 건 당연했다. 이후 13년간 그녀는 한번도 태극 유니폼을 벗지 않았고, 마침내 후배들을 이끌고 올 9월 미국에서 열리는 여자월드컵에 출전하게 됐다. 이명화(30.INI스틸). 한국 여자축구의 산 역사라 할 수 있는 그녀를 24일 만났다.

-월드컵 티켓이 걸려 있었던 아시아선수권대회 일본과의 3~4위전 주심이 북한 심판이었는데.

"북한 국가대표 출신인 이홍실 심판과는 국제대회에서 자주 만나 친한 사이였다. 후반 끝날 무렵 부심이 추가시간 5분을 알렸다. 그 때부터 나는 주심 뒤만 쫓아다녔다. '언니, 우리도 미국 한번 가 보자''언니 너무해, 빨리 좀 끝내'하며 졸라댔다. 그래도 주심은 정확하게 5분 뒤에 종료 휘슬을 불었다. 경기가 끝난 뒤 이홍실 심판이 '전반에 페널티킥 상황이 있었는데 그냥 넘어가줬잖아'라며 웃었다. 전반 27분 내가 골문 근처에서 일본 선수를 잡아당겼지만 주심은 계속 경기를 진행시킨 걸 말한것 같았다."

-대회 출전 전 파주 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NFC)에서 쫓겨난 적이 있었다는데.

"남자 대표팀이 온다며 사흘간 나가 있으라고 했다. 인근 호텔로 옮겼는데 이게 러브호텔이었다. 수시로 데이트족이 드나들었다. 침대에서 자기가 찜찜해 이불을 갖다달라고 해 깔고 누웠지만 서럽고 분한 마음에 잠을 설쳤다. 음식도 나빴고, 운동할 의욕도 없었다. 지옥같은 사흘이었다."

-그런 설움이 선수들의 투지를 자극한 점도 있지 않았나.

"그렇긴 하다. 대회에 나가면서 고참 선수들이 '이번이 월드컵에 나갈 마지막 기회다. 후배들은 이런 수모를 겪지 않게 하자'고 다짐했다. 일본전에서 몇몇 선수들은 다리에 쥐가 나 울면서 뛰기도 했다."

-초창기 대표팀의 수준은 어땠나.

"수준이라 할 것도 없었다. 나처럼 볼을 뻥뻥 차는 선수는 드물었다. 킥.패스 등 기본기부터 새로 배웠다. 발로는 전술 훈련이 안돼 손으로 볼을 던져가면서 했다. 당시 초등학교 남자 선수들과 경기를 하면 우리가 힘으로 밀어붙여 어거지로 이겼고 질 때도 있었다. 지금은 중3 선수들과 대등하게 경기할 정도로 수준이 향상됐다."

-대표팀의 첫 국제대회였던 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때는 어땠나.

"중국에 0-16, 대만에 0-14, 북한에 0-7로 졌다. 그래도 홍콩한테는 1-0으로 이겼다. 중국 선수들 플레이를 보면서 '여자가 저렇게 축구를 잘 할 수도 있구나'하고 깜짝 놀랐다."

-여자가 축구한다고 창피당한 적은 없나.

"나는 외모가 남성스러워서 괜찮았는데 예쁘장하게 생긴 선수들은 '여자가 맨다리 내놓고 축구 하나'하는 소릴 들으면 창피했다고 한다. 요즘은 택시를 타서 축구 선수라고 하면 '여자축구, 좋죠. 우리나라는 여자가 악바리라서 남자보다 먼저 세계 정상 갈거요'라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지금까지 돈은 얼마나 벌었나.

"8년간 실업팀에 있으면서 1억원 정도 모은 것 같다. 차도 한 대 샀고 어머니께 용돈도 가끔 드린다. (이명화는 국내 선수 중 최고 연봉을 받는다)"

이선수는 은퇴한 뒤 미국에서 제대로 된 지도자 수업을 받고 싶다고 했다. 지금은 남자친구가 없지만 신문에 사진이 잘 나오면 생길 지도 모르겠다며 활짝 웃었다.

정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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