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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평생 민주화에 헌신한 김영삼 전 대통령 (1927∼2015 연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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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어록 중 맨 처음에 오르곤 하는 말이다.

경상남도 거제 출신의 김 전 대통령은 1952년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장택상(張澤相) 총리의 인사담당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54년 최연소(26세)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된 뒤 9선의원을 역임했다.

의원 시절 그는 '야당 민주화 투사'였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그의 유명한 말도 독재와 싸우던 중에 나온 말이었다.

그는 야당 원내총무를 5번 지내고, 야당총재를 3번(74년·79년 신민당, 87년 통일민주당) 지냈다. 80년 이후 신군부세력이 등장했을 땐 2년 동안 가택연금되고, 83년 5월 18일부터 6월 9일까지 민주화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했다.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뒤인 84년엔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공동의장직을 맡아 민주화 운동세력을 하나로 모았고, 85년 1월 신한민주당을 창당해 2·12총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87년 6월 민주화운동의 결과물로 실시된 대통령 직선제 선거에서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와의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뒤 통일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차점으로 낙선했다.

88년 2월 제13대 총선에선 제 3당(제2야당)으로 밀려나며 정치적 위기를 맡았다. 하지만 90년 1월 집권여당이던 노태우 대통령의 민정당, 김종필 총재의 공화당과 3당합당을 통해 민자당을 출범시킨뒤 여당으로 대변신했다. 그의 도전은 성공으로 끝났다. 그는 92년 14대 대통령선거에 당선돼 결국 문민정부를 출범시켰다.경남중학교 3학년때 하숙집 책상머리에 붓글씨로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적어놓았던소년 YS의 꿈은 그렇게 꼭 46년만에 현실이 됐다.

강태화·현일훈 기자 thkang@joongang.co.kr
[사진 중앙포토DB]

오늘 서거한 김영삼전 대통령은 평생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다. 다음은 주요 활동.

1927년 12월 4일 출생( 호적상 12월 20일)
1945년 경남중학교 입학
1948년 서울대 문리대학 철학과 입학
1951년 학도의용군 입대
1952년 3월 손명순여사와 결혼
1952년 5월 장택상 국회 부의장의 비서관으로 임명

1954년 5월 자유당 후보로 최연소 제3대 민의원 당선
1954년 11월 사사오입개헌 통과되자 12월 자유당 탈당
1955년 4월 민주당 입당 9월 민주당 중앙당 청년부장 겸 경남도당 부위원장 임명
1958년 5월 제4대 총선 부산 서구 갑구 출마하나 낙선
1960년 7월 제5대 총선 부산 서구 갑구 당선
1963년 3월 박정희 군정연장 반대집회 전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1963년 11월 제6대 총선 부산 서구 갑구 당선
1967년 2월 통합야당인 신민당 입당 후 원내총무와 대변인 지냄
1967년 6월 제 7대 총선 부산 서구 갑구 당선
 68부정선거 항의 원외 투쟁
1969년 6월 박정희 대통령 3선개헌 반대투쟁 중 자택에서 초산테러 당함

1971년 1월 40대 기수론 주장 대통령출마 선언(신민당경선 결선투표에서 김대중에 패배)
1971년 5월 제8대 총선 부산 서구 갑구 당선
1972년 10월 유신선포이후 귀국 가택연금. 대여투쟁 지속
1973년 2월 제 9대 총선 부산 서구 갑구 당선
1973년 9월 김대중 납치사건 대정부질문 테러행위라 규탄

1974년 8월 최연소 야당총재로서 신민당 총재 복귀
1975년 2월 박정희의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 거부운동 선언
1975년 3월 뉴욕타임스 금주의 인물로 선정
1975년 5월 박정희 대통령과 여·야 영수회담
1976년 당총재 경선에서 이철승에게 패배
1978년 12월 제10대 총선 부산 서구 갑구 당선
1979년 5월 당총재 선거 승리
1979년 6월 방한한 미국 카터 대통령과 국회에서 회담
1979년 8월 ‘YH사건’ 원인되어 법원은 신민당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
1979년 10월 뉴욕타임스지를 통해 미국의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 철회 요구 발언으로 당총재·의원직 제명과 가택연금 당함
부마항쟁사태로 이어짐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 사망하자 주위 반대에도 불구 빈소 방문
1980년 5월 자택에서 신군부 비상계엄확대 규탄 기자회견 후 가택 연금(가족을 통해 외신에 '5·17폭거와 광주참극에 대한 원상복구' 성명 발표)
 8월 최후 수단으로 정계은퇴 선언

1981년 5월 가택연금 해제 후 재야인사들과 민주산악회 출범
1983년 5월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를 기념 전두환 정권 탄압에 대한 저항으로 23일간
단식농성
1984년 11월 김대중과 신한민주당 창당
1985년 2월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
1987년 4월 김대중과 통일민주당 창당 발표
 8월 후보단일화 결렬과 김대중의 탈당
 10월 대통령선거 출마선언
 12월 제13대 대통령선거 낙선
1990년 1월 3당합당
1990년 1월 민주자유당 당대표 선임 되나 내각제 반대하며 민정당계와 갈등
1990년 9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축하차 방미. 부시 대통령과 회담
1992년 3월 제14대 총선 선거에 출마해 전국구 당선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선거 당선
1993년 2월 제14대 대통령 취임 ‘문민정부(文民政部)’
 3월 3·1절 기념식에서 ‘부패와의 전쟁’ 선포
 신경제 건설을 위한 특별담화 발표. 금융실명제 실시 천명
자신과 가족의 재산 공개
 5월 군부 사조직 하나회 해체
 12·12군사쿠데타 및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성격을 재규정하는 특별담화 발표
 10월 '부마사태'를 '부마민주화운동'으로 재규정
 12월 우루과이라운드 쌀시장개방 관련 대국민 사과담화 발표
1994년 2월 남북정상회담 추진 선언
 3월 공직선거 및 부정선거방지법, 정치자금법개정안, 지방자치법개정안 등 문민정부 정치개혁법안 국회 통과
 9월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 대북경수로 지원사업에 대한 한국의 입장 전달
 12월 유엔군사령부로부터 군 평시작전통제권 환수
1995년 1월 마틴루터킹센터가 수여하는 비폭력평화상
 7월 부동산 실명제 실시
 8월 구 조선총독부 청사 해체
 12월 '5 · 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국회 통과
1996년 4월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4자회담 개최 제의
 8월 해양수산부 신설
 10월 대한민국 OECD에 가입
1997년 9월 신한국당 명예총재 추대
 11월 신한국당 탈당
 IMF에 대한 구제금융 신청 공식 발표
1998년 2월 25일 대통령 퇴임
1999년 6월 백범 김구 기념사업회로부터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에 추대
2000년 1월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출간
2003년 1월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 접견
2009년 8월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영결식 참석
2012년 4월 대통령기념도서관 기공식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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