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이원종 전 수석 "최근까지 다 알아보셨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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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 사진공동취재단 KPPA ]

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오전 0시21분께 서거했다. 향년 88세.

김 전 대통령은 지난 19일부터 지병이 악화돼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다.김 전 대통령은 몸에서 열이 나는 등 혈액감염 의심 증상을 보여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치료중 21일 상태가 악화돼 중환자실로 옮겨졌으나 끝내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서거 전까지는 상도동 자택에서 통원 치료를 받아왔다. 고령인데다 체력이 많이 떨어져 종종 서울대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아왔고, 그 때마다 며칠씩 입원했다. 마지막 입원했던 19일 전에도 10일 검진 차 병원을 찾아 17일까지 입원했다 퇴원했었다고 한다.

김영삼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이원종 전 수석은 이날 기자와의 통화에서 “최근까지만 해도 상도동 자택에 방문한 사람들을 다 알아보고 일일히 대답을 할 정도로 건강이 나쁘지 않았는데, 서거 소식을 들으니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이 전수석은 “김영삼 정부때 인사들은 22일 오전 일찍 서울대병원에서 모두 모일 예정”이라고 전했다.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는 이달초 기자와 통화에서 “아버님의 건강이 좋지는 않지만 병원에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건강이 나아지면 상도동 사저 인근에 지어질 ‘김영삼기념도서관’에 출퇴근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며 건강이 호전될 것이란 기대를 보이기도 했었다.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김대중(DJ)ㆍ김영삼(YS)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됐다. YS와 DJ가 이끌던 상도동과 동교동은 지금까지 민주화 세력의 양대산맥이자 한국 정치의 산실로 꼽힌다. 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30~40년가까이 한국정치를 풍미했던 3김씨 가운데 이제는 김종필(JP) 전 자민련 총재만 남게 됐다.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20일 경남 거제에서 아버지 김홍조, 어머니 박부연의 외아들로 태어나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서 최연소로 당선된 뒤 5ㆍ6ㆍ7ㆍ8ㆍ9ㆍ10ㆍ13ㆍ14대 국회의원까지 9선 의원을 지냈다.

전두환 전 대통령 등 신군부가 등장했던 1980년대 들어 23일간 단식 투쟁을 했으며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 85년 2.12 총선 신민당 돌풍, 87년 6월 민주화 항쟁 등을 주도하며 한국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뒤 12월 대통령선거에서 당시 노태우 후보에게 패해 차점으로 낙선했다. 그러나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면서 민정-민주-공화 3당 합당을 통해 야당 총재에서 여당 대표로 변신한 뒤 1992년 대선에서 DJ를 물리치고 14대 대통령에 당선돼 군정시대의 막을 내리고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 재임 기간 중엔 청와대에서 '칼국수'와 '설렁탕'을 주식으로 삼으며 부패척결에 나섰다. 하나회 숙청, 금융 실명제 도입 등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외환 위기에 따른 IMF 관리체제를 초래해 임기 초반 90%까지 치솟았던 절대적 지지도를 대부분 잃었다.

김 전 대통령의 좌우명은 ‘대도무문(大道無門)’이다. “모든 일에 정당하다면 거리낄게 없다”는 뜻이다. 가장 유명한 어록으로는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이 있다. 신민당 총재이던 1979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미국의 박정희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를 주장했다가 여당이던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가 YS에 대한 의원직 제명안을 가결시켰을 때 했던 말이다. 그의 말처럼 당시 여당의 무리한 제명은 ‘부마(釜馬)항쟁’을 촉발했다. YS는 퇴임 후인 2010년 6월 경남 거제시에 건설된 기록전시관 준공식에서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정부 수립에 버금가는 일대 사건이었다”며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마침내 왔다”고 했다.

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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