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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내 정상 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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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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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
논설위원

외교의 첫걸음은 의전이고 그 의전의 꽃은 만찬으로 통한다. 온갖 수단이 동원되는 외교이기에 공식회의 이상으로 오·만찬 행사는 중요하다. 아름다운 음식에다 술까지 곁들여지면 참석자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넘어가 속마음을 털어놓기 일쑤다. 특히 정상 간 오·만찬은 상대방에 대한 주최국의 감정을 표현하는 기회로도 활용된다.

 국제정치학의 대부 한스 모겐소가 “국가 생존이 좌우되는 곳이 바로 만찬장”이라고 한 것도 그래서다. 실제로 지난 9월 미국을 방문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위해 백악관은 말레이시아계 스타 셰프 애니타 로를 불러 특별메뉴를 준비했다. 로는 바닷가재, 양고기 요리와 함께 초콜릿으로 만든 빨간 중국풍 정자와 다리를 디저트로 내놔 시 주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양국 간 친교를 기대한다는 사인임은 물론이다.

 반면 광우병이 한창이던 1996년 영국 정부는 런던을 방문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에게 자국산 쇠고기를 내놨다. 누가 봐도 영국산 쇠고기 수입 금지에 대한 항의였다.

 자리 배치도 민감한 사안이다. 어디 앉느냐가 그 나라 위상의 척도라 여겨지는 탓이다. 2009년 런던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만찬에서는 영국·이탈리아 총리가 갓 취임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근처에 못 앉으면 나가겠다고 우겨 결국 뜻을 이뤘다.

 오·만찬 장소 역시 중요하다. 61년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무함마드 칸 파키스탄 대통령은 미 국부로 추앙받는 조지 워싱턴 생가에서 저녁을 해야 한다고 요구, 관철시켰다. 자신 역시 파키스탄 국부임을 과시하기 위한 술수였다.

 이번 한·중·일 정상들이 참석한 환영만찬이 1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다. 문화적 공간이야말로 세 나라 관계를 개선시킬 최적의 만찬 장소라 판단된 모양이다.

 미술관에서 국가적 행사가 열린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2년 핵안보정상회의 때 정상들의 배우자를 위한 만찬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마련됐다. 습기가 문화재를 손상시킬 거란 이유로 반대도 심했다.

 하지만 외국 미술관 내 만찬은 흔한 일이다. 대영박물관은 물론 영국 내셔널갤러리도 각 전시실에서 몇 명의 식사가 가능한지 광고할 정도다. 89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선 주요 7개국(G7) 만찬이 열렸으며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 때 정상 만찬이 개최된 곳도 스미스소니언미술관이었다. 다기능이 각광받는 시대다. 박물관·미술관 역시 여러모로 활용하는 것이 지혜 아닐까.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