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파업시대] 1. 불법과 합법의 갈림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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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줄줄이 파업이다. 조흥은행 파업이 진행되고 있고 철도노조, 건강보험 직장노조, 금속노조 등도 파업을 예고한 상태다. 한마디로 지금은 파업시대다.

정부는 지금까지 불법파업이라 하더라도 명분 있는 주장에는 귀를 기울이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조흥은행의 파업에 대해선 불법으로 규정하고 강경대응에 나서고 있다.

이를 두고 해석의 차이인지, 정책의 전환인지 분명치 않다는 지적이 많다. 또 무엇이 불법이고, 무엇이 명분 있는 주장인지에 대해서도 노.사.정의 주장이 엇갈린다.(편집자)

"세입자가 주인더러 집을 팔지 말라고 할 수 있습니까. "

조흥은행 파업을 지켜본 한 금융계 인사의 말이다. 정부의 시각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조흥은행의 매각이 경영권과 관련된 사항이므로 파업의 대상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정하영 국무총리실 노동정책과장은 "조흥은행 파업은 명백한 불법행위다"며 "국민의 세금(공적자금)이 투입돼 살아난 은행이 파업을 벌이는 데 대해 국민이 지지를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은행의 전산직원은 국가 기간산업망 종사자로 이들은 불법.합법과 관계없이 파업에 참여하기 위해 근무현장을 이탈하는 것 자체가 중대한 처벌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노조의 주장은 다르다. 이미 지난해 파업 찬반투표를 거쳐 쟁의신청을 냈으니 불법이 아니라는 것이다.노조측은 "우리의 파업이 불법이라면 한국에서 불법 아닌 파업은 없다"고까지 주장한다.

파업의 적법성 여부에 대한 노(勞)와 정(政)의 엇갈린 입장은 분규 때마다 나타나는 현상이다. 처음부터 불법을 자인하고 시작하는 파업은 거의 없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오는 28일 예고된 철도노조의 파업도 정부는 일찌감치 불법으로 판단하고 있다. 구조개혁은 쟁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다.

그러나 노조는 ▶이번 파업은 지난 4월 민영화 철회를 주장했던 쟁의행위의 연속이고▶당시 노조원 찬반투표와 조정 절차를 거쳤다는 이유로 법적인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파업에서 불법과 합법은 어떻게 갈리는가. 파업권이란 근로자가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사용자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권리다. 사용자의 부당한 노동행위에 맞서 노동자의 권익을 되찾도록 하는 수단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파업권을 마구 휘두르게 되면 경제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은 물론 기업이 살아남을 수 없다. 그래서 노동법은 목적.절차.방법이 모두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져야 비로소 합법 파업으로 인정한다.

우선 목적과 관련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은 노동쟁의에 해당되는 사안에 대한 파업만 합법으로 인정한다. 노동쟁의는 임금이나 근로시간 등 근로조건과 관련해 노사 간에 견해차가 심해 분쟁이 일어난 것을 말한다. 따라서 근로조건에 해당되지 않는 제도개선이나 경영권을 내걸고 파업에 들어가면 불법이 된다.

구조개혁을 이슈로 삼은 철도 노조나 지분매각을 반대하는 조흥은행 노조의 파업을 정부가 모두 불법으로 분류한 것은 이 때문이다. 반면 궤도연대(부산.대구.인천 지하철 노조)와 현대자동차 등이 예고한 파업은 목적과 관련해서는 합법이다.

목적이 합당하더라도 폭력이나 파괴행위를 하면 불법 파업이 된다. 말 그대로 일을 하지 않고 농성을 벌이는 수준에서 파업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두산중공업의 경우 파업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농성을 하면서 파괴행위가 일어나 불법이 됐다. 절차도 중요하다. 반드시 노동위원회의 조정절차를 거치고 조합원을 대상으로 찬반투표를 해야 합법 파업으로 인정된다.

노동위원회는 근로조건 등 쟁의대상만 조정신청을 받아들이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조정신청을 받지 않는다. 조정신청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안을 들고 파업에 들어가면 당연히 불법 파업이 된다.

이런 기준에 따르면 지금 교섭 중이거나 파업을 예고하고 있는 사업장들이 파업에 들어갈 경우 대부분 합법 파업이 된다. 모두가 임.단협 결렬을 내세우고 있고, 노동위원회의 조정과정을 거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들이 임단협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법과 제도와 관련된 사안이나 경영권과 직결된 요구사항을 끼워넣고 있다는 점이다. 형식적으로는 합법이지만 내용상으로는 합법과 불법의 경계선을 미묘하게 왔다갔다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궤도연대의 경우 임단협과 함께 외주용역 철회 등 경영권과 관련된 것을 함께 요구하고 있다. 직장의보 노조도 건강보험 재정통합 반대를 외치고 있다. 현대자동차 노조도 해외공장 증설이나 합작 때 노조의 합의를 요구하는 등 경영권과 관련된 요구도 함께 하고 있다.

이완영 노동부 노사조정과장은 "파업에 들어갈 경우 어느 것이 주된 파업 원인인가를 따져 불법과 합법을 규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불법 파업을 부추기는 원인으로 개별노조가 사측과의 충분한 교섭 없이 상급단체의 파업 일정을 너무 의식한다는 점도 지적된다.

노동부는 그 예로 금속노조를 들고 있다. 금속노조는 사용자 측과 충분한 교섭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난 11일 중앙노동위원회에 1백25개 사업장에 대한 쟁의조정 신청을 냈다.

노동부 관계자는 "교섭도 제대로 하지 않고 절차상 합법성을 부여받기 위해 조정신청을 낸 것"이라며 "이는 민주노총의 파업 일정에 맞추기 위한 분규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런 파업이 시작돼도 형식적으론 불법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정부로서도 냉가슴만 앓는 것이다.

특별취재팀 = 남윤호.김기찬.정철근.장정훈(이상 정책기획부).이정재(경제부)기자
사진=최승식 기자<choiss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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