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박정호의 사람 풍경] 창립 70년 현암사 조미현 대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4면

기사 이미지

현암사의 연 매출은 40억원 남짓이다. 조미현 대표는 “사업을 키우는 재주는 없다. 작지만 강한 출판사로 남겠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 12일 서울 서교동에 있는 출판사 현암사를 찾았다. ‘1945~2015, 70년 책바치 100년을 향해 나아갑니다’라는 플래카드가 눈에 띈다. 사옥 5층 조미현(45) 대표 방에 들어가니 앨범 30여 권이 널려 있다. “전시에 쓸 사진을 고르고 있나요?” “맞아요. 할아버지가 남긴 것이죠. 얼마나 빈틈이 없는지 사진마다 메모를 남겨놓았어요. 성격이 꼼꼼하다 못해 좀 이상했던 건 아닌지….”(웃음)

유례 드문 3대 ‘책바치’ … 우리 법전 안 본 고시생 있나요

 현암사가 창립 70년을 맞았다. 해방둥이다. 우리 말과 글을 되찾은 그해, 조 대표의 조부 조상원(1913~2000)씨가 대구에서 차린 건국공론사가 모태다. 조 대표는 부친 조근태(1942~2010)씨에 이어 3대째 회사를 맡고 있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단행본 70년 3대 경영은 우리 출판계에서 유례가 드문 일이다. 다음달 13~30일 경기도 파주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에서 70년 기념전을 여는 조 대표를 만났다.

기사 이미지

조미현 대표가 할아버지 조상원(왼쪽)씨와 아버지 조근태씨의 초상화를 들고 있다.

 - 재미있는 사진을 많이 찾았나.

 “할아버지가 1956년 가족과 함께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열차 안에서 손을 번쩍 들고 있는 사진이 있다. 그 밑에 ‘대구여 안녕’이라고 적었다. 기대가 크셨던 것 같다. 할아버지에게 받아쓰기를 배우며 자랐지만 이런 사진이 있는 줄은 몰랐다. 올여름 내내 출판사 보관실에 있던 앨범더미를 정리했다. 현암(玄岩)은 할아버지의 아호다. 시인 박목월이 지어줬다. 현암사 간판은 51년 달았다.”

 - 다른 사진을 더 소개한다면.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시집 『청록집』이 있다. 조지훈·박목월·박두진 청록파 세 시인의 작품을 을유문화사에서 46년에 냈는데, 현암사에서 그들의 다른 작품을 묶은 『청록집 이후』 『청록집 기타』를 68년 출간했다. 할아버지가 조지훈 시인의 묘소에서 막걸리를 뿌리며 출판기념회를 여는 사진이 되레 새롭다. 두 책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게 없어 이번에 고서점에서 새로 구입했다.”

 - 책바치라는 단어가 입에 착 감긴다.

 “가죽신을 만드는 사람을 갖바치라 했다. 책바치는 책을 만드는 사람이다. 할아버지가 빚은 말이다. 장인정신의 상징이다. 이보다 더 훌륭한 표현도 없는 것 같다. 책 한 권이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다. 책바치로 사는 게 얼마나 영광된 일인가.”

 - 전시회에서 무엇을 보여주나.

 “지난 70년간 2500여 종을 발간했다. 그중 대표작을 내놓는다. 현암사의 바탕이 된 『법전』 시리즈, 『육당 최남선 전집』, 박경리의 『시장과 전장』, 이어령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황석영의 『장길산』 『어둠의 자식들』, 윤범모의 『한국 현대미술 100년』, 최완수의 『추사집』 등 우리 문화사를 살찌운 책들이다. 할아버지·아버지가 쓰시던 책상과 유품도 있다. 토요 인문학 강의, 어린이 체험학습 프로그램도 준비했다.”

기사 이미지

조상원(가운데)씨가 1968년 시인 조지훈의 묘소에서 막걸리를 뿌리며 시집 『청록집 이후』 출판기념회를 여는 모습.

 - 본인이 꼽는 3대 보물이라면.

 “출판사 첫 작품인 시사종합지 ‘건국공론’ 창간호다. 45년 크리스마스에 나왔다. 새 나라, 새 시대에 대한 부푼 기대를 엿볼 수 있다. 『법전』을 빼고 현암사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59년 이후 지금까지 57판을 냈다. 그리고 69년 나온 『한국의 명저』다. 당대 석학 100명에게 의뢰해 우리 고전 명저 100권을 해제한 대형기획이다.”

 - 『법전』 시리즈는 현암사의 효자다.

 “고시생의 필수품이다. 『법전』에서 나온 수익으로 회사 1년 살림을 했다. 덕분에 동서양 고전, 자연도감, 예술서적 등을 안정적으로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다. 모든 법령이 인터넷에 공개돼 있다. 로스쿨 도입으로 고시생도 확 줄어들었다. 디지털 사전 때문에 국어사전도 찍지 않는 시대다.”

 - 나름 책임감이 막중하겠다.

 “잘해야 본전이다.(웃음) 할아버지·아버지가 쌓아온 걸 무너뜨리지만 않으면 다행이다. 문득문득 ‘내가 말아먹는 건 아니겠지’ 하는 걱정도 든다. 요즘 출판사마다 어렵다고 하는데 그래도 60~70년 전과 비교할 수 있겠나. 할아버지 때는 종이가 매우 귀해 마분지로 책을 찍기도 했다. ‘배부른 소리’ 하지 않으려고 한다. 70년을 넘어 100년이 가는 장수기업으로 키우고 싶다. 할아버지가 목표했던, 올해 102년을 맞은 일본의 이와나미(岩波)서점처럼 말이다.”

 - 이화여대 섬유예술과를 나왔는데.

 “대를 이어 출판사를 할 계획이 전혀 없었다. 미대 교수가 되려고 했다. 미국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97년 IMF 금융위기로 돌아와야만 했다. 사실, 아버지가 들어오라고 했다. 직원 월급도 주기 빠듯한데 무슨 유학이냐고 했다. 98년 영업 평사원으로 들어와 현장부터 익혔다. 서울 동대문 서적도매상이나 지방서점 사장님과 소주를 마시고 개고기를 먹으며 일을 배웠다. 경험 삼아 넉 달만 하자고 한 게 4년이 됐다. 아버지와 타협 끝에 2002년 미국 유학을 떠나 뉴욕대에서 출판학 석사 학위를 땄고, 2005년부터 다시 회사에 다녔다. 책 만드는 재미를 알게 됐다.”

 - 술 실력이 센 편인가.

 “고2 때 아버지에게 배웠다. ‘여자도 앞으론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며 저를 앉혀놓고 술을 가르치셨다. 단 조건이 있었다. 집에 똑바로 들어올 것, 주정하지 말 것, 길에서 토하지 말 것, 세 가지였다. 지금까지 철저히 지키고 있다. 대학 때는 소주 세 병 정도는 거뜬했다. 취한 친구들을 집에 다 데려다주었다. 지금은 한 병이면 족하다.”

 - 할아버지·아버지의 그늘이 크겠다.

 “할아버지는 완벽주의자였다. 신의와 성실을 목숨처럼 여겼다. 직원 급여나 거래처 대금을 한 번도 미룬 적이 없었다. 현암사 어음이 은행 어음보다 더 정확하다는 말도 있었다. 아버지도 그 정신을 이어받았다. 한 번은 관리이사가 어음결제 관계로 직원 월급을 하루만 늦추자고 했는데 ‘그러려면 회사 그만둬라, 당장 은행 대출을 받아 해결하라’고 호통을 쳤다. 그 음덕을 제가 보고 있다. 지금도 현암사 일이면 무조건 믿어줄 테니 ‘알아서 하라’는 분들이 많다.”

 - 조부께서 한때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와 함께 대구일보에 다녔다는 일화도 있다.

 “할아버지 회고록에서 본 적이 있다. 할아버지는 해방 직후 대구일보에 입사했으나 기자가 아닌 영업부로 발령이 나자 사표를 내고 잡지사를 차리셨다. 두 분 사이에 친분이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제가 대학생 때 아버지께 투정을 부린 적이 있다. 할아버지도 책 말고 다른 장사를 하셨으면 제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겠느냐고….”(웃음)

 - 부친께서 뭐라 대답하셨나.

 “‘돈 많은 게 꼭 행복한 게 아니다’고 짧게 말하셨다. 평소 물욕이 적은 분이다. 늘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를 강조하셨다. 옷도 몇 가지 없었다. 이번에 유품을 정리하다 ‘무당(無堂)’ 글자가 새겨진 인장을 처음 봤다. ‘집이 없음’이란 뜻이다. 저도 따르려고 애쓰지만 물건이 넘쳐나는 요즘, 평범한 여자로서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웃음)

 - 2009년 대표가 됐다. 이제 6년째인데.

 “부모 잘 만난 행운아라는 시선이 있다. 인정한다. 등록금 걱정 없이 학교를 다니고, 지금 이 자리까지 왔으니까. 그래서 더 노력하고 있다. 가업을 잇는 건 쉬운 게 아니다. 옛날 아버지의 고민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영화 ‘허(her)’를 보면 편지 대필작가가 나온다. 저도 편집자나 저자 생일에 손 편지를 직접 써서 보낸다. 책은 본래 아날로그다. 쉽게 끓는 전자밥솥보다 오래 끓는 가마솥에 가깝다. 그런 감동이 있는 책을 만들겠다. 넓고, 길게, 30년 앞을 보며 가겠다.”

[S BOX] 매일 성경 한 장씩 읽고, 요즘 『도덕경』 『장자』에 빠져

농반진반으로 푹 찔러봤다. “그간 나온 2500종 가운데 몇 권이나 읽었을까요.” 우문현답이다. 조 대표는 “누가 그걸 세고 있겠어요. 몰라요. 어려서는 아버지가 집에 가져온 책을 정독했지만 요즘에는 그때만큼 꼼꼼하게 읽지 못해요”라고 말했다. 여덟 살 때부터 교회에 다닌 그는 성경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요한복음이든, 잠언이든 하루에 한 장씩 읽는다.

사무실에 출근하면 책상 위에 놓인 『도덕경』 혹은 『장자』를 들춘다. 종교학자 오강남씨가 해설을 단 책이다. 역시 분량은 많지 않다. 하루에 한 장씩이다.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밑줄을 치고 노트에도 옮겨 적는다. 200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온 뒤에 붙은 습관이다. “갑자기 상무라는 직함을 받아 회사에 적응하기 힘들었죠. 오늘 하루 이것만이라도 지키자, 그것도 발전이다, 그런 생각에서였죠”라고 했다.

그가 『도덕경』 9장을 펼쳐 보였다. ‘넘치도록 가득 채우는 것보다 적당할 때 멈추는 것이 좋습니다. 너무 날카롭게 벼리고 갈면 쉬 무뎌집니다. (중략) 일이 이루어졌으면 물러나는 것, 하늘의 길입니다’가 들어왔다. 지나침의 부작용을 경계한 글이다. “『도덕경』과 성경 잠언은 통하는 대목이 많아요. 다음에는 할아버지가 좋아했던 『채근담』을 읽으려고요.”

글=박정호 문화·스포츠·섹션 에디터 jhlogos@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