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으로] 갈수록 느는 직장 내 성희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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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여성 신입사원 A씨는 사내에서 황당한 일을 겪었다. 옆 부서의 10년 차 과장 B씨가 동료 직원들을 상대로 “나 며칠 전에 A랑 자는 꿈을 꿨다”고 말하고 다니는 걸 듣고서다. B씨는 기혼 남성이었다.

“며칠전 A랑 자는 꿈꿨다”→ 정직·감봉
“중국어로 콘돔이 뭐예요”→ 인권 교육

사내에 일파만파 소문이 퍼지자 격분한 A씨는 B씨를 찾아가 따지며 사과를 요구했다. 하지만 B씨는 “내가 너에게 직접 자자고 한 것도 아니고 내 꿈 얘기를 동료들에게 한 것뿐인데 뭐가 문제냐”고 맞섰다. 이런 경우도 성희롱에 해당될까. 정답은 ‘예스’다.

정미선 직장남녀연구소 대표는 “피해자에게 직접적으로 발언을 하지 않았더라도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해 회사 생활이 어렵도록 했다면 엄연한 성희롱”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참다못한 A씨는 회사 인사팀을 찾아가 항의했고 회사는 B씨에게 정직과 감봉 처분을 내린 뒤 다른 사업장으로 발령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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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 성희롱 사건은 매년 늘어나는 추세다.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소속 임수경(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여성가족부로부터 제출받은 ‘직장 내 성희롱 발생 현황’ 자료에 따르면 성희롱 진정 접수는 2010년 105건에서 지난해 267건으로 두 배 넘게 늘었다. 5년간 접수된 총 건수가 854건에 달한다.

남성이 아닌 여성 상사가 성희롱 가해자가 되는 경우도 늘고 있다. 휴대전화 부품 하청업체에 근무하던 김모(27)씨는 지난해 같은 팀 여성 부장의 성희롱 때문에 회사를 그만뒀다. 40대 초반 기혼 여성이었던 이 부장은 업무를 가르쳐준다는 이유로 김씨를 불러 옆에 앉히고 “다리가 튼실하네” 등의 말을 하며 허벅지를 만졌다. 회식을 하는 날이면 옆자리로 와 허벅지를 붙이고 앉기도 했다. 참다못한 김씨는 사장을 찾아가 하소연했지만 “사내 자식이 성적 수치심은 무슨!”이라는 말만 들었다고 한다. 김씨는 지난해 말 이 부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했으나 이 부장과 합의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됐다. 정 대표는 “성을 자존심의 영역과 연관시켜 생각하는 남성일수록 성희롱·성추행에 대한 쇼크와 상처가 클 수 있다”고 설명했다.

동성 간 성희롱 사례도 늘고 있다. 미혼인 여성 신입사원 C씨가 그런 경우다. 어느 날 바로 위 여성 상사인 D씨가 C씨를 부르더니 머리를 쳐다보며 “아기 낳은 적 있어? 무슨 잔머리가 이렇게 많아. 아이 낳은 여자처럼…”이라며 혀를 찼다. 또 C씨의 목덜미에 있는 아토피 자국을 보고는 “어젯밤 남자랑 뭐 했어? 목에 이게 뭐야?”라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격분한 C씨는 같은 부서 차장 등 상사에게 D씨의 언행을 알렸지만 회사에선 아무 조치가 없었다. 결국 C씨는 D씨와 회사를 상대로 3000만원 상당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지난 7월 법원은 “피해자가 성적 수치심을 느낀 정황이 인정되므로 피고는 소속 기관과 공동으로 위자료 5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수연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조사과 인권팀장은 “성희롱에 대한 잣대는 행위자가 여성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으며 싫다면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했다.

채용 면접을 보러 온 구직자에게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경우도 성희롱에 해당된다. E씨는 2012년 한 회사에 채용면접을 보러 갔다. 최종 면접까지 올라온 구직자는 4명. E씨와 일대일 면접을 보던 회사 사장은 갑자기 E씨에게 “얼굴을 보니 두 번 결혼할 상이다” “엉덩이가 예쁘게 생겼다”고 말했다. 이어 E씨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대더니 “바로 근무하라”고 했다. ‘뭐 이런 회사가 다 있지’라고 생각한 E씨는 곧바로 집에 돌아왔고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에 진정을 냈다. 인권위는 “입사 면접 과정에서 구직자가 성적 굴욕감을 느꼈다면 성희롱”이라며 “해당 사장은 특별인권교육을 수강하고 E씨에게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고 권고했다. 인권위는 구직자에게 “중국어를 잘한다는데 중국어로 콘돔이 뭐예요?”라고 묻고 이에 답을 하자 “그거 은어 아니에요? 중국에서 그런 곳에도 가고 그랬나보네”라고 말한 회사 면접관 역시 성희롱 행위를 했다고 보고 특별인권교육 수강을 권고했다.

직장 내 성희롱이 증가하며 ‘어떤 경우에 성희롱이 징계해고 사유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대법원은 2008년 사건에서 “성희롱 행위가 심하거나 반복적으로 행해지는 경우 피해 근로자들의 고용 환경을 감내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시킬 수 있으므로 (해고 사유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제조업체에서 과장으로 일하던 한모씨는 2011년 1월 여직원 F씨에게 “내가 갈 테니 방문을 열어 놓고 기다려라”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F씨와 함께 우산을 쓰고 가다가 허리와 엉덩이를 만지기도 했다. 참다못한 F씨가 사직하겠다고 하자 “남자친구와 무슨 일 있느냐, 임신했느냐”고 되물었다. 결국 회사 측은 한씨를 징계해고했다. 그러자 한씨가 해고무효확인 소송 제기로 맞섰다. 결과는 한씨의 패소. 서울행정법원은 지난해 7월 “원고가 퇴사하는 여직원에게 ‘임신했느냐’고 말한 것은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정미선 대표는 “‘성희롱’ ‘성추행’은 직장 내 복잡하고 다양한 권력관계 때문에 발생한다”며 “단 한 번이라도 농담이나 우스갯소리를 하다가 성적인 발언이 섞이면 성희롱이 된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고 했다.

[S BOX] 피해자가 성적 굴욕감 느꼈는지가 판단 기준

직장 내 성희롱은 매년 증가하는 추세지만, 남녀를 불문하고 당사자들은 ‘이런 것도 성희롱이 맞는지’를 두고 헛갈려 한다. 핵심은 피해자가 ‘성적 굴욕감’을 느꼈는지 여부다.

 정미선 직장남녀연구소 대표는 “여성가족부의 설문조사 결과 ‘언어적 성희롱’이 전체의 약 76%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다”며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른 만큼 판단하기 애매한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다만 신체적 부위를 두고 평가하는 말을 한다면 대부분 성희롱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성적 굴욕감을 판단하는 기준은 네 가지다. 첫째로 피해자의 주관적 기준에 따라 성희롱 행위가 굴욕감을 줬는지 여부다. 정 대표는 “여성의 경우 속옷을 착용한 등 부위에 손을 올리는 게 아무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큰 수치심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며 “행위자의 의도가 아니라 특정 행동이 피해자에게 어떤 굴욕감을 줬는지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사회 통념도 기준이 된다. 성희롱 행위자가 ‘딸같이 귀여워서 허벅지를 만졌다’고 주장해도 상식적으로 딸이 귀여워 허벅지를 쓰다듬는 아버지가 없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희롱 사건이 벌어진 장소, 행위자와 피해자 간 관계, 행위자의 성적 의도 정황 등도 고려 대상이다. 마지막으로 ▶성희롱 행위가 반복적으로 벌어졌는지 ▶특정 대상에게 집중됐는지 ▶거부 의사를 밝혔는지 여부에 따라 처벌 수위가 달라진다.

임장혁·조혜경 기자 wisel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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