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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적 집필기구 설립, 10년 이상 갈 교과서 만들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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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당리당략에 따른 여야의 교과서 대립이 치열해질수록 그 틈바구니에서 정작 멍드는 건 제대로 된 역사 교육, 번듯한 역사 교과서다. 정권이 바뀌면 다시 교과서 논란이 벌어질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국정 전환으로 새롭게 선보인 ‘2017년 교과서’는 논란의 요소를 얼마나 배제할 수 있을까. 이념 갈등의 골이 깊은 우리 사회이기에 자칫 또 한 차례 ‘교과서 홍역’을 겪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이참에 어지간해선 흔들리지 않는 수준 높은 역사 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제안도 이어진다. 역사 교육의 백년대계를 세울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역사 교과서, 이참에 제대로 <상>
역사·사회·철학자들의 제언
70년대 집필 참여 한영우 교수
“어용 낙인찍힐까 참여 꺼릴 우려”
좌도 우도 아닌 중진 연구자로 구성
유연하게 소통 … 문제 제기도 반영
진보·보수 모두 동의할 교과서를

 #‘불편부당 교과서위원회’ 만들자

 서울대 한영우 국사학과 명예교수는 “2017년 역사 교과서는 집필진 선정부터 애를 먹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역사학 연구자 대부분이 국정이 아닌 검인정을 찬성하는 상황에서 누가 섣불리 집필에 참여하려고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1970년대 초반 국사 교과서 집필에 참여했던 자신의 경험을 들려줬다. 그는 ‘교육의 국적을 되찾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방침과 식민사관을 극복하자는 취지 아래 이뤄진 교과서 제작 과정에 참여했다. 한 교수는 “당시 새 교과서 제작 과정을 총괄했던 문교부 산하 국사교육강화위원회에는 이선근 영남대 총장, 김성근 서울대교육대학원장, 이기백 서강대 교수 등 당대의 권위자들이 대거 참여했다”고 전했다.

 한 교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과서 집필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나는 어용교수로 낙인찍혔다. 한때 학계를 떠날 마음이 들었을 정도로 절망감이 컸다”고 회고했다. 이번 국정교과서 집필에 참여할 필자들 역시 그런 피해를 볼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한 교수는 “진보·보수를 망라해 필자를 구성하겠다는 발상도 어불성설”이라고 했다. 진보·보수 필자가 함께 집필에 참여할 경우 서로의 입장을 절충할 필요가 있을 텐데 입장을 절충한다는 것은 결국 지금까지 각자 지켜왔던 학문적 소신을 포기하겠다는 얘기 아니겠느냐는 지적이다. 이념 성향이 다른 필자들이 한 사안에 대해 의견 조율을 해도 문제이고(학문적 소신 포기), 조율을 하지 않아도 문제(교과서 집필 불가능)라는 진단이다.

 한 교수는 “좌도 우도 아니면서 학계의 폭넓은 존경을 받는 중진 연구자들로 일종의 합의체를 구성해 교과서 집필 과정을 세심하게 관여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합의체에서 현재의 교과서 집필 기준보다 더 촘촘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면 “국정체제 아래서도 큰 욕먹지 않는 교과서를 쓸 수 있지 않겠느냐”고 내다봤다.

 익명을 요구한 한 사학과 교수는 “정부의 갑작스러운 국정 전환 방침에 황당할 따름”이라면서도 “이왕 이렇게 된 거 권력이나 정치적 입장에 휘둘리지 않는 공익기구를 만들어 오래가면서도 균형 잡힌 교과서를 만드는 계기로 삼자”고 제안했다. 그는 “현재 교과서는 집필자의 이념 성향에 따라 내용이 들쭉날쭉할 뿐 아니라 지나치게 단편적인 사실이나 담론 소개 위주로 쓰여져 있어 재미가 없다”고 했다. 교과서에 스토리텔링을 집어넣어 역사 공부를 재미있게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문제는 그런 교과서 공익기구(가칭 교과서위원회)의 독립성 확보 여부다. 위원회를 장기간 운영하면서 그때그때 교과서에 대한 각종 문제 제기도 수용해 반영하고, 학계의 새로운 연구 성과를 순발력 있게 받아들이는 일도 중요한 업무다. 그러려면 “탄력적이면서도 유연한 소통구조가 필수적”이라고 했다.

 한신대 윤평중 철학과 교수 역시 “대통령 직속 위원회를 만들어 진보·보수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통합교과서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위원회에 지식인, 역사 전문가, 일반 시민 등을 폭넓게 참가시키되 10년 이상 가는 장기 프로젝트를 시작하자”고 말했다.

 #지금의 교과서 틀에서 벗어나자

 경희대 김중백 사회학과 교수는 “보수냐 진보냐의 교과서 프레임에만 갇혀선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며 “역사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 보자는 방식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만 접점이 찾아질 것”이라고 했다. 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장도 “명망 있는 석학들부터 정쟁이 아닌 학생들을 위한다는 관점에서 역사 교육을 고민해야 한다”며 “논쟁이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토론하고 화합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발등의 불인 현재의 갈등에서 잠시 벗어나 주변을 둘러보자는 얘기다.

 이배용 원장은 “역사 교과서라고 해서 역사 분야에만 매몰될 게 아니라 사회학·정치학·법학 연구자들도 집필에 참여하게 하자”고 했다. 가령 경제 발전 영역을 서술할 때 경제학자의 식견을 녹이자는 제안이다. 이 원장은 “상급 학교로 진학해도 똑같은 내용을 반복해 배우는 현재 교육 시스템도 다시 생각해 보자”고 말했다. 가령 초등학교에서는 인물사, 중학교에선 정치사, 고등학교에서는 사상사 식으로 배우는 내용 자체를 달리해 역사 과목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자는 제안이다.

 서울대 주경철 서양사학과 교수는 “프랑스의 경우 초·중학교 과정에서는 역사 교과서가 있지만 고등학교에서는 교과서 대신 역사 교사가 선정한 교재로 역사를 배운다”며 “역사 교과서에 목매는 우리 현실이 정답인 것만은 아니다”고 지적했다.

특별취재팀=신준봉·백성호·성시윤·김호정·강태화·윤석만·노진호·백민경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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