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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로펌, 기업공개 시장도 잠식 … 국내 로펌 60곳 폐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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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 국내 대형 로펌(법무법인) 국제중재 팀장이었던 A변호사는 최근 동료 변호사 3, 4명과 함께 로펌을 나왔다. 기업 인수합병(M&A) 및 국제중재 전담 ‘부티크펌(소형 전문 로펌)’을 차린 것이다. 그는 “고객들에게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A변호사처럼 중견 변호사들이 전문 분야별로 함께 로펌에서 나와 부티크펌을 만드는 현상이 최근 잇따르고 있다. 법조계 일각에선 “내년부터 법률시장이 3차 개방될 때를 대비한 포석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해외 로펌과의 합작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란 얘기다.

위기의 로펌 <1> 안팎으로 치이는 법무법인
변호사 포화, 불황, 해외 공세 3중고

 # 또 다른 대형 로펌에서 형사사건을 주로 담당해온 김모 변호사는 요즘 줄어드는 매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파트너 변호사로서 몇 년째 사건 수임에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 지난 7월 말 대법원의 ‘형사사건 성공보수 폐지’ 판결로 설상가상이 됐기 때문이다. 상황은 다른 로펌들도 다르지 않다. B변호사는 “계속된 불경기 속에 기업 컨설팅 등 사건 의뢰 건수 자체가 준 데다 수임료 단가도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며 “과거엔 맡지 않던 1000만~2000만원대 사건까지 수임해야 하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형 로펌 몇 곳을 빼고는 대부분의 로펌이 2~3년 전부터 파트너 변호사들의 연봉을 20~30%씩 삭감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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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년 7월 법률시장 3차 개방을 앞두고 대형 로펌들의 위기가 현실화되고 있다. 변호사 2만 명 시대가 열리면서 시장이 포화된 데다 외국계 대형 로펌까지 공세를 강화하면서 ‘내우외환’을 겪고 있는 것이다.

 특히 지난해부터 문을 닫은 로펌만 60개에 이른다. 지난해 중소형 로펌 30개가 공중 분해된 데 이어 올 들어선 8월 말까지 30여 개가 폐업했다. 대한변협 관계자는 “폐업 로펌 대부분은 한 해 사무실 유지비 4억~5억원을 감당 못한 변호사 10명 미만의 중소형 로펌들”이라고 말했다.

 대형 로펌들의 위기감도 커지고 있다. 본지 설문조사에서 ‘외국계 로펌 진입에 따른 가장 큰 위협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국내 10대 로펌 대표변호사 10명 중 5명이 ‘국내 대기업의 해외 M&A 자문 분야’라고 답했다. 나머지 5명은 기업공개(IPO), 지적재산권 등 분야에서의 전문성을 꼽았다.

 현재 한국 법률 시장에선 외국계 로펌 26곳(미국계 21개, 영국계 5개)이 지역사무소 등을 내고 활동 중이다. 이 중 20곳이 세계 랭킹 100위권 내 대형 로펌들이다. 국내 대형 로펌의 규모는 외국계 대형 로펌과 비교할 때 ‘다윗과 골리앗’과 같다. 국내 상위 15개 로펌의 매출액 합계가 2조원가량으로 세계 1위 로펌 베이커 앤드 매킨지의 한 해 매출(2014년 2조7635억원)보다 적다.

 이러한 초대형 외국계 로펌들이 M&A와 해외투자, 금융 등 분야에서 급속도로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지난 9월 초 완료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국내 대기업 계열사 간 기업결합이었지만 삼성물산은 김앤장과 함께 영국계 로펌인 허버트 스미스 프리힐스에 법률자문을 맡겼다. 합병 계획을 발표한 직후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이 반대 소송에 이어 주총 대결까지 벌이면서 미국 내 기업 M&A 전문 로펌인 왁텔 립턴에 거액의 수임료를 주고 별도로 방어전략을 자문했다. 외국 로펌과 국내 로펌이 공동으로 M&A 자문을 할 경우 기업 실사 등 국내 로펌의 업무량이 훨씬 많은데도 수임료는 외국계 로펌들이 자국 기준을 적용해 5~10배 더 많이 받는다고 한다.

 외국계 로펌의 서울 사무소가 국내 대기업 공략을 위한 ‘전초 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국내 대형 로펌의 한 파트너 변호사는 “10조원대 대형 M&A의 경우 법률 자문료가 100억원대에 이른다”며 “한 건만 따내도 10년 동안 사무소 운영비가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해외 헤지펀드의 적대적 M&A와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투자자·국가간 소송(ISD)이 늘고 있는 것도 외국계 로펌으로선 블루오션이다. 론스타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5조원대 ISD 소송의 경우 론스타 측에선 미국계 시들리 오스틴과 법무법인 세종이, 한국 정부 측에선 아널드 앤드 포터와 태평양이 대리전을 벌이고 있다.

 IPO나 지적재산권 분야도 상황은 비슷하다. 삼성SDS는 지난해 기업공개를 앞두고 클리어리 고틀리브·폴헤이스팅스 등 외국계 로펌에 법률자문을 맡겼다. 폴헤이스팅스는 코오롱과 듀폰의 1조원대 영업비밀 침해 소송에서 코오롱 측 대리인을 맡기도 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아시아 지역(일본 제외) IPO 자문 상위 로펌 20위 내에 국내 로펌은 한 곳도 포함되지 못했다.

특별취재팀=정효식 팀장, 김백기·임장혁·백민정·이유정 기자 jjp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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