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 박상륭 원작 '평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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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움이 판치는 대학로 한 복판, 바탕골 소극장에서 '존재에 대한 명상'이 실험되고 있다.

한 신인 여성 연출가가 박상륭의 근간 단편소설집의 제목을 따와 무대화한 '평심'(박정희 각색.연출.사진)이 그것이다.

문학인들도 그 바닥 모를 깊이를 두려워하며 오직 경배를 바칠 뿐이라는 박상륭 문학, 과연 그의 문학의 무엇이 겁 없는 연극인들을 끌어들일까? (박상륭 소설에 대한 연극계의 도전은 1997년 '뙤약볕' 이후 두번째다.)

그것은 아마도 박상륭 문학의 세가지 화두라고 할 수 있는 '몸'과 '말씀(언어)'과 '마음'일 것이다. 그리고 이 세가지는 바로 연극이, 특히 현대 연극이 끌어안고 몸부림치는 세가지 숙제일 수도 있다.

막상 올려진 공연은 원작 소설들로부터는 한걸음 비켜서 있다. 각각의 단편 소설에서 이름을 따온 인물들이 있을 뿐이다. 무대 역시 박상륭 문학의 어둡고 끈적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밝고 아늑한 현대적 일상에서 출발한다.

다만 무대 한편에 벗은 남자의 시신이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누워있으며 잘 살펴보면 무대 바닥은 몇권의 거대한 책들이다.

절대진리를 꿈꾸는 물리학자 로이, 남편을 잃은 여배우 왈턴 부인과 화투패를 들여다보고 있는 명상가 앤더슨 부인은- 아마도 이들은 '말씀'과 '몸'과 '마음'일 수도 있을 텐데 - 서로 밀고 당기며 덧없는 생명체들의 중력장을 이룬다.

그러다가 이내 '나비의 날갯짓'은 '폭풍'을 일으키며 카오스 속에서 생명은 자기조직화를 시작한다. 그리하여 생명과 죽음의 순환(有情→無情→死→空→業)이 전개되고 그 순환 속 어느 순간엔가 '평심(平心)'이 이루어졌다가는 이내 다시 허물어지는 것이다.

노자와 장자, 상대론적 물리학들이 뛰노는 연극은 원작 이상으로 난해하다. 인물들의 씨줄도, 윤회의 날줄도 아직 혼란스럽다. 다만 아름다운 것은 어린애와 같은 천진한 접근으로 '말씀'을 넘어 '몸'을 통해 '마음'에 다가가려고 했던 연출자의 은근한 노력이며, 빛났던 것은 배우들이 집요하게 건져낸 신체언어들이다.

북 클럽의 전화벨이나 관객석에 앉아있던 은유적 '박평심'씨의 피살, 옷 바꿔입기 같은 연극적 재치도 심상치 않다.

그러나 해설자.시계.조명을 이용한 지나치게 친절한 설명들은, 모처럼 존재의 심연 속에서 그 결과 울림을 즐겨볼까 했던 관객들을 방해하기도 했다.

김방옥 (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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