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폭력의 심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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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6호 26면

일러스트 강일구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어떻게 저럴 수 있어요?”


이성을 사귀는 것에 어려움이 있다는 남성의 하소연이다. 호남 형에 훤칠한 키, 서글서글한 말투의 전문직 종사자였다. 여성들이 싫어할 만한 구석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도 관계를 잘 지속하지 못했다. 최근 마음에 드는 여성을 소개받아 여러 번 만났고 지난 주말엔 좋은 식당에도 갔단다. 그러나 상대가 연락을 끊었고, 문자로 이별을 통보를 받았다.


“제가 그 여자에게 쓴 돈이 얼마인지 아세요? 시간은 얼마고요!”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하느라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단다. 너무 답답해서 그녀의 근무지에 찾아가거나, 집 앞에서 무작정 기다려 보겠다는 말도 했다. 연민과 공감을 바라던 눈빛이 점차 분노로 변했다. 나는 거기서 데이트폭력 전 단계의 위험 징후를 읽었다.


데이트폭력이 급증하고 있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연인 관계에 있던 사람으로부터 폭행·성폭행 등을 당한 사람은 3만6362명이나 된다. 애인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하는 건수도 5년 사이 두 배 가까이 급증했다. ‘쿨’을 기조로 삼으며 끈적끈적하게 엮이는 것을 싫어하는 현대 사회에서 왜 데이트폭력은 늘고 있는 것일까.


사회적 관계 맺기를 익히지 못한 채 어른이 된 사람이 늘었다는 것이 첫 번째 원인이다. 특히 똑똑하고 학업성취도가 높은 사람일수록 공부하느라 친구를 사귀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뭘 해야 하는지 시행착오를 거칠 기회가 없었다. 학교-학원-집을 쳇바퀴 도느라 관계 맺기의 ABC도 익히지 못한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걸 깨달은 고학력 남성들이 익숙한 방식으로 찾는 돌파구가 '학원'이라는 것이다. 고액의 수강료를 내고 픽업아티스트가 운영하는 학원에 간다. 그러나 이건 배워서 느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면서 느는 것이라는 게 문제다.


두 번째 이유는 PC게임을 하면서 자라났다는 것이다. 동네에서 친구와 놀면서 자란 세대와 PC게임을 하면서 자라난 세대의 마음 작동기제는 다를 것이다. 한쪽은 인간관계의 불완전성을 직접 경험하고, 내가 들인 노력에 비해 돌아오는 것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반면 게임의 세계는 투입한 노력에 대한 대가가 분명한, 공정하게 잘 설계된 세상이다. 가상세계에서 롤플레잉 게임으로 간접 경험을 하면서 자란 일부는 현실에서 상대를 만날 때도 그러기를 바란다. 시간과 돈을 쓴 만큼 좋은 아이템을 받을 수 있듯이, 상대의 호감도 그만큼 돌아와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인간관계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아닌 것은 아니다. 열 번 찍어도 안 넘어갈 나무는 안 넘어 간다. 현실과 가상공간 사이의 차이를 깨닫고 전략을 수정하기보다 “여기는 왜 이래”,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어”라고 분노하며 이성을 마비시킨다. 데이트 폭력의 결정적 방아쇠가 당겨진 것이다.


가해자는 사랑하기 때문에 그랬다고 해명한다. 그러나 상대를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만족을 위한 대상으로 인식하려는 병적인 자기애의 소산일 뿐이지 사랑이 아니다. 이런 메커니즘이 작동하니 겉으로는 멀쩡한 남성들이 폭력적으로 돌변하게 된다. 남성들은 문자로 이별을 통보하는 여성들의 행동에 분개한다. 그 안에 내재된 두려움을 이해한다면 판단이 달라져야 한다. 사랑은커녕 관계의 ABC부터 익혀야 할 사람이 늘고 있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jhnh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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