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역사’로 본 한국 여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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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어디” … 그들은 편견과 싸웠다

‘당신의 역사’ 시리즈의 48명 가운데 여성은 11명입니다. 세상의 절반은 여성이지만 아쉽게도 시리즈의 절반은 여성이 아니었습니다. 과거 여성들의 삶은 가정이 중심이었고, 자신의 일보다 주부, 아내, 며느리로서의 역할이 우선이었으니까요. 가정을 돌보며 동시에 자신의 일을 계속해 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인터뷰한 여성들은 대부분 젊은 시절부터
꾸준히 자신의 일을 함으로써 일가를 이룬 이들입니다. 이들의 이야기에는 ‘어디 여자가 운동을 하느냐’‘여자가 뭘 하겠나’ ‘여자가 극성맞게 일에 욕심을 부린다’는 편견과 싸워야했다는 대목이 빠지지 않습니다. 그들의 역사를 통해 한국 여성의 역사를 돌아봤습니다.

귀염둥이 막내딸로 자란 김광자(90)씨의 인생이 180도 달라진 건 스무 살 되던 해, 어란 만드는 집안으로 시집을 오면서부터였다. 광주 과수원집 막내딸로 태어난 그는 수학여행을 일본으로 다녀올 정도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막내딸을 애지중지하며 하고 싶은 건 뭐든지 하도록 했다. 하지만 45년 전라남도 영암 어부의 집안으로 시집을 오면서 시어머니와 함께 밤새 생선 배를 갈라 어란을 만드는 힘든 생활이 시작됐다. 한량이었던 남편은 아내의 고생을 모른 척했다.

1940~50년대 여자들의 삶은 그랬다. 부모님의 뜻에 따라 결혼하고 결혼해서는 가사와 출산·육아를 혼자 힘으로 감당하며 남편과 시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서 여성들은 자녀를 키우며 생계를 책임졌다. 김씨는 낮에는 음식점을 하고 밤에는 어란을 만들며 집안을 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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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세상의 중심은 남자들 차지였다. 하지만 그런 남자들의 뒤에서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가족을 건사한 건 여자들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하종순(78) 마샬뷰티살롱 회장은 결혼 후 미용실에서 일하는 걸 숨겨야 했다. 친정에 경제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일을 하고 싶었지만 아내가 일하는 걸 싫어하는 남편의 눈을 피해야 했다. “남편이 출근하면 몰래 가게에 나갔지. 퇴근 전 집에 전화해보고 남편이나 시댁 식구들이 있으면 ‘친구 만나고 왔다’며 한복을 갈아입고 집에 들어갔어.”

60~70년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기술도 없던 여자들이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직업은 식모, 공장 여공, 아니면 버스 안내양이었다. 허정희(63)씨가 중학교 때 가출해 서울에 올라와서 한 일은 남의 집살이였다. 그 후 미제 물건을 떼어다 팔거나 대학가에서 하숙을 치며 집안을 꾸려나갔다.

 일부 전문직종에서는 여성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성우 고은정(79세)씨는 59년 라디오 드라마 ‘장희빈’을 통해 국민적 스타가 됐다. 남들이 버린 드라마 대본을 쓰레기통에서 주워다가 읽고 또 읽으며 연습하며 자신을 단련한 끝에 이룬 성과였다. 첫아이 낳고 12일 만에 나와서 녹음을 했고, 둘째를 임신했을 땐 진통을 참아가며 일했다. “내게 주어진 일에 책임감을 갖고 끝까지 하려다 보니 그렇게 일할 수밖에 없었죠.”

 심영순(74) 요리연구가는 집으로 찾아온 손님들에게 맛난 요리를 만들어 준 것이 입소문을 타면서 요리연구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집으로 찾아오는 고위층 며느리들에게 요리를 가르치며 ‘옥수동 심 선생’으로 명성을 떨쳤다.

 조병국(82)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 명예원장은 63년부터 소아과 전문의로 아이들을 보살폈다. 당시 서울시립아동병원의 사정은 열악했다. 기저귀 채울 고무줄이 없어 링거 줄을 잘라 쓸 정도였다. 75년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으로 옮긴 그는 병든 아이들을 돌보며 부모 없는 아이들에게 새 부모를 찾아줬다. 자신이 낳은 세 아이보다 버려진 아이들을 우선 돌봤다.

80년대 이후 여성들의 삶은 주부에 머무르지 않았다. 60~70년대 급속한 산업발전으로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불가피해졌고, 81년 대우가 국내 대기업 최초로 기혼 여성을 고용하면서 여성 취업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현대차 첫 여성 임원인 김화자(60)씨는 아이 둘을 낳은 후 ‘뭔가 해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자동차 세일즈를 시작했다. 피나는 노력으로 ‘여자가 뭘 하겠느냐’는 편견을 깼다.

 국내 최초 여성 태권도인 김영숙(68) 사범이 태권도를 시작할 때도 그랬다. ‘어디 여자가 운동하느냐’는 주변의 시선을 남자들보다 나은 실력으로 격파해 나갔다. “태권도를 하는 여자가 없었기 때문에 대련은 늘 한 뼘이나 더 큰 남자들과 해야 했어요. 모든 자세를 남자들보다 더 완벽하게 해야 했지요.”

심옥령(63) 인천청라달튼외국인학교 초등학교 교장은 교사 경력 10년 되던 해 ‘촌지 거부’를 선언하고 인성 교육을 실천했다.

90년대 모델 김동수(58)는 TV와 책 등을 통해 ‘자신만의 개성을 찾으라’고 설파했다. 국내보다 해외 무대에서 먼저 명성을 얻은 그는 한국적인 얼굴의 아름다움을 일깨웠다. 64년 동대문운동장 실내스케이트장이 개관할 즈음 스케이트 인생을 시작했던 국내 1세대 피겨스케이터 이인숙(60)씨는 평생을 피겨스케이팅에 바치며 한국 피겨계를 이끌었다.

2000년대 이후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개선됐다. 교사는 물론이고 의사, 판검사, 교수, 공무원 등 각종 전문직에 여성 비율이 크게 높아졌다. 여자라는 이유로 교육을 못 받는 일도 과거보다 크게 줄었다.

 하지만 ‘유리 천장’은 여전히 존재한다. 여성 고위 관료나 기업체 임원은 찾아보기 어렵다. 가사와 육아의 부담은 여성의 사회생활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13 세계 성(性)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성 평등 순위는 세계 136개 나라 가운데 111위였다.

정리=박혜민 기자 park.hyemin@joongang.co.kr,
취재=메트로G팀,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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