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논쟁

중등 교육 학습량을 줄여야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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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의 초점 2015 개정 교육과정 내용이 과목에 따라 20~30%까지 학습량을 줄이는 것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교육계의 논쟁이 뜨겁다. 학습량을 줄이는 것이 학생들의 경험의 질을 높이는 방안이라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결국 교육경쟁력을 떨어뜨리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비등하다. 양쪽의 입장을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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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경험 양보다 질 개선해야

황규호
이화여대 교수
교육과정개정 연구위원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뜨겁다. 바람직하고 당연한 현상이지만 이런 논쟁들이 이해집단의 목소리 크기 경쟁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학생의 학습 경험의 질을 개선하고자 하는 교육과정 개정 취지에 부합하는 논쟁이 되어야 한다.

 학습량 감축 여부에 대한 논쟁은 한편으로는 학습량을 줄여 학습 부담(그리고 그에 따른 사교육 부담)을 줄여줘야 한다는 입장과, 다른 한편으로 교육의 국제경쟁력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는 교과별 기본지식에 대해 충분한 학습이 필요하다는 입장의 대립으로 요약된다. 학습량 감축을 반대하는 입장은 주로 교과교육 전문가나 교과와 관련된 학계 인사들의 주장인데, “학생들이 싫어하거나 어려워하더라도 배워야 할 것은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주장의 요지다. 이러한 주장은 모두가 알아야 할 ‘기본지식’을 가르치기 위해 더 많은 시수를 해당 교과에 배정해야 한다는 시수 확대 요구로도 이어진다.

 모두가 알아야 할 것을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모든 학생이 반드시 알아야 할 기본지식을 무엇으로 규정할 것인가다. 예컨대 2009 교육과정 개정에 참여한 일부 과학 전문가는 ‘최소한의 과학적 소양’이라며 전문 과학자들에게도 생소한 현대 과학지식을 다수 포함시켰다. 과학교사들이 당황했음은 물론이요, 학생들도 난해한 용어들과 씨름하느라 큰 어려움을 겪었다. 현대 과학지식을 이해시켜야 한다는 의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참된 학습의 과정에서 개념적 이해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고려하지 못한 채 더 많은 낱낱의 세부 과학지식들을 포함시키고자 했던 개발자의 과도한 의욕이 낳은 결과다.

 학습량 적정화의 목적이 단순히 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줄여주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학습량 적정화의 근본적 취지는 학생의 학습 경험의 질 자체를 개선하는 데 있다. 100개를 암기하던 것을 50개만 암기하도록 해 부담을 줄여주는 식의 변화가 아닌, 소수의 핵심 원리를 이해함으로써 100개 이상의 사실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도록 하는 것이 학습량 적정화의 요체다. 더 많은 지역의 특산물을 더 많이 기억하는 교육을 넘어 예컨대 “우리가 사는 장소는 어떻게 사는가에 영향을 미친다”는 큰 그림을 배경으로 낱낱의 지역 특성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과제가 돼야 한다.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난 연도를 하나하나 기억하는 것을 넘어 역사적 사건들의 인과관계의 성격을 이해하고, 역사에 기록되는 것과 기록되지 않는 것, 기억하는 것과 기억하지 않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탐구·논의하고 이해하는 역사 교육이 돼야 한다.

 학습량의 적정화는 학습 경험의 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기본조건이다. ‘진도 나가기’에 급급해 토론이나 탐구의 시간을 갖기 어렵다는 교사들의 하소연은 학습의 질 개선을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양적 적정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물론 학습량 적정화가 학습 내용 요소들의 개수 감축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내용 요소 감축 자체가 목적이 돼서도 안 된다. 더욱 중요한 과제는 교과별 학습 내용을 ‘핵심 원리’ 중심으로 엄선하고, 이를 중심으로 관련되는 세부 사실들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내용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구조화하는 일이다. 학생들이 느끼는 학습 부담은 학습 주제의 개수 자체가 원인일 수도 있지만, 기본개념이나 큰 그림에 대한 이해 없이 백과사전식 단편지식들을 낱낱으로 기억하게 하는 수업 및 평가 방식이야말로 학습의 즐거움을 빼앗고 의미 없는 부담을 가져오는 근본적 원인이다.

 교육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알아야 할 것을 빠짐없이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이 타당하려면 진정으로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교육의 경쟁력은 양의 과다가 아닌 학습 경험의 질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황규호 이화여대 교수 교육과정개정 연구위원

교육경쟁력을 높이는 게 관건

양정호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

지난주에 모두 마무리된 ‘2015 개정 교육과정 공청회’의 내용을 보면, 현재보다 과목에 따라 20%에서 많게는 30%까지 학습량이 줄어들게 된다. 지금까지 교육과정이 여러 번 바뀔 때마다 학생들의 학습량 감축은 핵심 내용으로 제시됐다. 가깝게는 2007년 개정 교육과정과 2009년 개정 교육과정이 적용되면서 매번 20% 내외의 교육내용이 감소했다. 결국 2015 개정 교육과정이 적용되는 2017년에는 배우는 내용이 10년 전에 비해 50% 정도 감소한다는 얘기다. 교육부가 교육경쟁력을 키우기보다는 학생들의 학력 하락을 부추긴다는 우려를 받을 만하다.

 우리나라가 지금과 같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된 것은 교육의 힘이 매우 컸다. 힘들지만 자신보다는 하나라도 더 배우게 해야 한다는 학부모의 열망과 열심히 하려는 학생들의 의지 덕분에 현재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한다고 해도, 10년 동안 배우는 내용이 절반으로 급격히 줄어든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쉽지 않다.

 2015 개정 교육과정의 내용을 보면 더욱 우려되는 부분이 많다. 수학에선 초·중·고에서 모두 특정 내용이 축소 또는 삭제되거나 상급 학교에서 배울 수 있게 조정되었다. 영어는 모든 학생이 배워야 할 성취 기준(학습목표) 수를 아예 줄여, 초·중학교에서는 듣기와 말하기를 중심으로 배우고, 고등학교에서는 읽기와 쓰기 비중을 높였다. 국어만이 학습량이 줄어드는 대신에 초등학교 1, 2학년에서 한글 교육이 강화돼 현재 27시간에서 45시간 이상으로 늘어난다. 전반적으로 국어·영어·수학을 비롯한 모든 과목의 학습 내용이 지금보다는 줄어들게 된다.

 교육과정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개편할 수는 있지만, 학습 내용이 줄어든다고 과연 사교육이 줄어들지, 학생들의 부담이 감소할지는 생각해 봐야 한다. 초·중·고에 다니는 학생 10명 중 7∼8명이 사교육을 받고 있는 현실에서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수업 부담은 줄어들지 모르지만, 학원에서 배워야 할 내용은 오히려 더 늘어날 수도 있다. 지금도 학원에서는 초등학교 학부모들에게 자유학기제 전면 실시로 인한 학력 저하를 강조하면서 오히려 중학교 1, 2학년 과정을 미리 배워놓아야 한다고 불안 마케팅을 강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치열한 입시 현실을 잘 알고 있는 학부모들이 교육부가 발표하는 2015 개정 교육과정의 취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학부모 중에도 소위 이해찬 세대가 점점 늘어가고 있다. 지금 30대 중후반인 이해찬 세대 학부모들은 98년 이해찬 교육부 장관의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에 갈 수 있다’는 말을 믿었다가 건국 이래 최저 학력 세대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가까운 일본에서도 2000년대 초반에 교육 내용을 30%까지 축소하는 ‘여유 있는(유도리) 교육’을 도입했다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학력평가에서 성적이 낮게 나오자 이전으로 되돌린 사례가 있다.

 자원이 풍부한 국가라면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처럼 자원도 제한돼 있고 심지어 남북으로 분단된 국가에서는 국제경쟁력을 갖춘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선진국에서는 단순히 더 쉽게, 더 적게 가르치기보다는 실생활에 적용되는 내용을 중심으로 재미있게 흥미가 유발되도록 가르치는 데 집중하고 있다.

 국제적 수준에 맞는 교육과정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정부가 바뀔 때마다 임시적으로 교육과정이 개정되는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국가미래교육위원회에서 최소한 초·중·고 12년을 미리 내다보고 교육과정을 이끌어 갈 수 있게 할 필요가 있다. 교육과정도 중요하지만 학교 현장에서 학생과 학부모에게 더 중요한 것은 주어진 교육과정이란 요리 재료를 가지고 흥미롭고 다양한 맛을 낼 수 있는 스타 셰프다. 이제는 교육과정 논란보다는 우리 모두가 교육경쟁력 강화를 위해 공교육을 정상화할 수 있는 스타 셰프인 교사가 수업 현장에 더 많아지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양정호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