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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구야 어찌 되든 간에 찍을 사람이 없다 아이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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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3호 8 면

천마산 중턱에서 눈에 보이는 부산 서구와 중구, 영도구. 아래쪽이 서구, 위쪽이 중구, 오른쪽 영도대교를 건너 영도구가 있다. 가운데 맨 위쪽에는 용두산공원에 있는 부산타워가 보인다. 사진 왼쪽 귀퉁이로 보이는 구봉산 뒤쪽에는 동구가 있다. 추인영 기자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빅3’의 지역구가 통폐합 대상으로 떠올랐다. 정의화 국회의장과 김무성 당 대표, 유기준 해양수산부 장관은 부산 18개 선거구 중에서 서로 인접한 지역인 중·동구, 영도구, 서구를 각각 지역구로 삼고 있다. 세 지역구 모두 8월 말 현재 단독 선거구를 유지하기 위한 인구 하한선에 미달돼 최소 1곳의 지역구가 사라지게 된다. 국회의장과 당 대표, 장관 등 힘 있는 빅3가 맞붙은 선거구를 어떻게 조정하느냐가 이번 선거구 획정에서 최대 관심사다. 하지만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는 아직까지도 선거구 획정 기준조차 정하지 못하고 있다. 여야간 입장 차이가 첨예한 탓이다. 결국 이리저리 시간만 끌다 정치적 외압 속에 게리맨더링(특정 후보자나 정당에 유리하게 선거구를 획정하는 것)이 재현될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정치권 안팎에서 치열한 셈법이 오가는 것과는 달리 지난 3일 부산에서 만난 민심은 냉랭했다. 선거구가 어떻게 조정되든 “정치인은 다 똑같다”는 정치 불신은 여전히 뿌리 깊었다.

부산 지하철 1호선 자갈치역에서 천마산 방향으로 꼬불꼬불한 길을 올라가다 보면 양옆으로 쭉 늘어선 1950∼60년대 식의 오래된 양옥 건물들이 눈에 띈다. 산중턱의 초장동 행복센터 앞에 도착하니 부산 서구와 중구·영도구가 한눈에 훤하게 들어왔다. 영화 ‘국제시장’의 마지막 장면에 나온 마을이 바로 이곳이다. 여기서 한눈에 보이는 세 지역구는 6·25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산중턱 길을 따라 정착해 이룬 마을 일대를 일컫는 ‘산복도로’로 유명하다. 서구와 중구·동구는 하나의 산복도로로 서로 이어져 있고, 섬 지역인 영도구는 별도의 산복도로가 형성돼 있다. 산복도로의 마을들은 지금은 각종 문화마을로 꾸며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지만 집들은 여전히 낡고 오래돼 주민들의 삶은 60여 년 전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이처럼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버거운 주민들에게 선거구 획정은 다른 세상 이야기처럼 들리는 듯했다.


이 산복도로가 이어지는 구봉산을 경계로 동구와 서구가 있고, 서구와 중구는 복개천(하천을 콘크리트로 덮어 만든 도로)을 경계로 구분된다. 중구와 동구 해변을 따라서 우리나라 최초의 무역항인 부산항이 형성돼 있다. 특히 중구는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 깡통시장 등 부산의 대표적인 재래시장이 밀집한 지역이다. 영도는 중구와는 영도대교와 부산대교로, 서구와는 남항대교로 이어지는 섬 지역이다.


이 3개 지역구의 인구 수는 현재 모두 인구 하한선(13만9473명) 보다 적다. 중-동구는 13만9391명, 영도구는 13만381명, 서구는 11만6611명이다. 중-동구는 하한선보다 고작 82명이 모자라 향후 인구 유입 추이에 따라 독립 선거구로 살아남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현재 인구가 하한선에 미달인 3개 지역구를 적어도 2개로 통폐합하다 보면 이들 ‘빅3’ 중 한 명은 지역구를 잃게 된다.

중-동구 분할 유력 … 정의화 ‘반발’ 현재 유력하게 거론되는 시나리오는 정의화 국회의장의 지역구인 중-동구를 쪼개 중구(인구 4만6320명)를 영도에, 동구(인구 9만3071명)를 서구에 각각 합치는 방안이다. 지리적 인접성이나 인구 수를 따져볼 때 가장 효과적인 방안이라는 것이 정치권 주변의 전언이다. 영도구와 중구는 다리 2개로 연결돼 있고 동구와 서구는 행정구역이 맞붙어 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도 지난 4월 ‘영도구+중구’‘동구+서구’를 통합선거구로 조정하는 방안을 당에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방안에 대해 김 대표와 유 장관 측은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이지만 선거구가 쪼개지는 정 의장 측은 “여당 대표와 현 정부 실세 장관이 모종의 정치적 담합을 하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 며 반발하고 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산 영도 지역사무실 건너편에 ‘오픈프라이머리’ 관련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김무성 느긋 … 유기준 촉각 ‘빅3’ 중에서도 가장 느긋한 쪽은 김 대표다. 현재 가장 가능성이 높은 방안대로 결정된다면 김 대표의 지역구는 ‘영도구+중구’가 된다. 김 대표 측도 이 안을 내심 원하고 있다. 김 대표 측 관계자는 “중구의 자갈치시장과 영도대교를 통해 이어지는 영도구의 태종대를 관광특구로 지정해 지역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자갈치시장 상인 중 50% 정도가 영도구 주민”이라고 강조한다.


서구가 지역구인 유 장관 측에서는 중구와 합치는 방안을 주장하고 있다. 유 장관 측 관계자는 “서구와 중구는 복개천을 사이에 두고 있을 뿐 사실상 한 지역구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부산 서구는 지난 2일 서구선거관리위원회에 ‘서구+중구’ 통합 방안을 1안으로 제출했다. 서로 지리적으로 맞닿아 있는 데다 중구의 유동인구 중 60%는 서구 주민들이라는 이유에서다. 유 장관 측은 그러면서도 현실적으로 유력한 ‘동구+서구’ 통합 방안에 대해서도 차선책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이다.


서구 지역 내 재건축이 예정된 동네가 많은 것도 변수다. 앞으로 재개발이 완료되면 이사 갔던 주민들이 다시 서구로 돌아와 인구가 늘어날 전망이어서 단독 선거구가 유지될 가능성도 여전히 남아 있다.


정 의장 측은 중-동구 쪼개기에 절대 반대한다. 대신 영도구와 서구를 합쳐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 의장 측 관계자는 “중구와 동구는 원도심이란 상징성이 있다”며 “중-동구를 쪼갠다는 것은 부산의 얼굴을 잘라내겠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20년 동안 동일 선거구를 유지하며 생활권과 행정적으로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다”고도 했다.


중-동구를 단일 선거구로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는 중구와 동구에 걸쳐 있는 부산항의 북항 재개발 사업도 거론된다. 150만㎡ 규모의 부지에 2조원의 예산을 투입해 2018년 완공을 목표로 진행 중인 메가 프로젝트인 이 사업이 완료되면 유동인구가 30만 명에 이를 것으로 기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도구+서구’ 방안을 주장하는 이유는 두 지역이 남항대교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남항대교 예산을 확보한 사람은 정 의장이라고 한다. 당시 영도구를 지역구로 둔 김형오(전 국회의장) 의원이 계수조정소위 위원이었던 정 의장에게 민원을 넣어 이뤄진 사업이라는 후문이다.


‘동구+서구’ 통합 방안을 놓고 정 의장 측에선 “지도상으로 볼 때는 두 지역이 서로 인접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구봉산으로 가로막혀 생활권이 나눠진 지역”이라며 “이를 강행한다면 완전한 게리맨더링”이라고 주장했다.


중-동구가 쪼개진다면 정 의장은 중구보다는 인구가 더 많은 동구를 선택해 ‘동구+서구’ 지역구에 출마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정 의장이 ‘영도구+중구’를 차지하는 김 대표보다 서구가 지역구인 유 장관과 한판 대결을 벌여야 한다는 이야기다. 김 대표보다 정 의장과 유 장관 측에서 선거구 획정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쏟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무소속 신분인 정 의장은 실제 총선 출마를 한다고 하더라도 2월에 있을 새누리당 내 경선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복당해야 한다. 그럴 경우 의장 임기인 내년 5월 30일을 못 채우게 되는 것도 문제다.


의장 출마 움직임엔 갑론을박 이처럼 복잡한 정치권의 셈법과 달리 현지에서 만난 시민들의 반응은 달갑지 않았다. “저희는 그런 거 관심 없어요. 누가 국회의원이 돼도 다 똑같아요. 경제는 절대 안 살아나요, 절대. 윗선에서 다 해묵으니까.” 자갈치시장에서 생선가게를 하는 신모(39·여)씨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중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주부 이모(48)씨도 “새로운 인물이 나와야지. 찍을 사람이 없는데 투표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 천지 삐까리라. 그러니까 투표율이 낮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 의장 지역구인 중구 자갈치시장에서는 국회의장의 선거 출마를 놓고 상인들끼리 갑론을박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곽모씨(61)는 “의장까지 했으믄 자진해서 (국회를) 나가야지. 출마해도 (당선은) 될 것 같은데 아무튼 지금 영도하고 중구, 동구하고 서구 두 개로 합쳐야 돼”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이모씨(59)는 “의장이 정계 은퇴하는 건 관례라는데 우리나라에 관례가 어딨노. 체면치레로 은퇴할 필요 없다”며 정 의장 편을 들었다.


학계에서는 결국 어떤 식으로 선거구가 조정되더라도 게리맨더링이 재현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하고 있다. 강휘원 평택대 행정학과 교수는 “여야가 국회 정개특위에서 지역구 의석 수 등 선거구 획정기준조차 정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부산 3구처럼 정치적으로 민감한 선거구는 정치적 외압에 따라 선거구가 획정될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박명호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선거제도와 의원 정수가 결정되고, 지역이나 권역별로 의석이 할당된 후라면 선거구 획정이 어렵지 않다. 그런데 상위조건이 전혀 구성이 안 된 상황에서 선거구 획정을 하라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는 것”이라며 “기술적인 문제를 논의할 획정위가 정치적 결정까지 맡게 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국회의장과 장관, 당대표 지역구의 운명은 이제 다음달 13일로 예정된 선거구 획정 결과 발표에 달려 있다.


부산=추인영 기자·조희형 인턴기자, 서울=천권필 기자 chu.i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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