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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슨 전구는 하루아침에 나온 것 아니다, 혁신은 수십 년의 산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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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사진 Nina Subin]

‘라이트벌브 모먼트(lightbulb moment)’라는 영어 표현이 있다. 전구에 불이 번쩍 들어오듯 순식간에 영감·깨달음이 떠오르는 걸 가리킨다. 역사상 위대한 발명·발견, 예컨대 에디슨의 전구도 이렇게 나온 걸로 전해진다. 한데 미국의 이름난 과학저술가 스티븐 존슨(47·사진)의 설명은 다르다.

그는 세상을 바꿔놓은 혁신이 순간적으로 떠오른 아이디어가 아니라 수십 년을 두고 구체화된 아이디어(그의 표현을 빌면 ‘느린 직감’)의 산물, 천재 한 사람의 업적이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연쇄적·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진 성취라고 본다. 그의 최근작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에 실린 얘기다. 세상을 바꿔놓은 과학기술사를 풍부한 사례와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한 이 책은 영국 BBC에서 동명의 TV다큐로도 만들었다. 저자를 e메일로 만났다.

 - 세상을 만든 여러 혁신이 ‘느린 직감’(slow hunch)의 산물이란 설명이 흥미롭다. 이런 직감이 혁신으로 이어지려면 뭐가 필요할까.

 “가장 단순하게는, 직감을 생생히 유지해야 한다. 직감은 잊기 쉽다. 그야말로 온전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파편이기 때문이다. 역사상 수많은 ‘느린 직감’의 혁신가들은 자신의 모든 아이디어를 노트에 기록하고 이를 다시 찾아보는 습관을 지녔다. 사회적 분위기도 필요하다. 불완전한 아이디어라고 말살하는 대신 편안하게 공유하는 조직 문화를 만드는 게 핵심이다.”

 - 뛰어난 발명·발견이 당대에 확산되지 못하다 비슷한 성취가 이뤄져 뒤늦게 조명받는 경우, 그런 잊혀졌던 천재들은 어떻게 봐야 하나.

 “시대를 앞서간 천재들도 가끔 있지만 그 숫자는 놀랄 만큼 적다. 발명은 무리 지어 이뤄지는 경향이 있다. 과거에는 아이디어의 확산이 느렸다. 그러다 근간이 되는 아이디어나 기술이 퍼지면 다른 진전의 가능성을 ‘잠금 해제’(unlock)한다. 사람들이 렌즈를 만들기 시작하자 그 기술이 유럽에 빠르게 퍼져 현미경·망원경이 여러 곳에서 동시에 발명됐다. 전구도 그렇다. 과거의 잊혀진 천재들은 지역적으로 고립된 경우가 많았다. 이들에게 필요했던 건 자신의 아이디어를 퍼뜨릴 사회적 네트워크였다.”

 - 혁신을 이루려면 자기 분야만 외곬로 파선 안 될 것 같다.

 “맞다. 최고의 발명가들은 다방면에 관심을 가진 아주 박식한 사람들, 아니면 접근 방식이 다른 발명가들과 팀을 이룬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취미도 아주 많았다는 게 내가 좋아하는 점이다. 그들은 세상에 대해 호기심이 있었고, 관심사가 많았다. 우리 모두가 닮아야 할 점이다.”

 - 유리·냉기·빛 등 책에 실린 6가지 테마는 어떻게 골랐나.

 “요즘 세상에 너무 흔해 우리가 더 이상 혁신이라 생각하지 않는 혁신, 유리처럼 더 이상 테크놀로지로 여기지 않는 것을 다루고 싶었다. 또 세상에 놀라운 영향을, 전혀 다른 분야에 큰 영향을 준 혁신을 다루고 싶었다. 로널드 레이건의 당선에 에어컨이 미친 영향이 좋은 예다. (책에는 레이건을 언급하진 않지만 에어컨이 보급되면서 연중 더운 미국 남부로 대량 이주가 가능해졌고 이에 따른 선거인단 변화가 미국 대통령 선거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한다.)

 - 지나친 단순화는 아닐까. 다른 요인도 있었을 텐데.

 “물론이다. 레이건이 에어컨 때문에만 당선된 건 아니다. 민권운동(에 대한 공화당 지지자들의 반감), 1964년 골드워터 선거운동(레이건은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 골드워터를 지지하는 연설로 전국적 주목을 받았다), 레이건의 배우로서의 경력 등등 많은 요소가 있다. 하지만 이는 늘 거론된 반면 에어컨의 중요한 역할은 언급된 적이 거의 없다.”

 - 기호학·영문학을 전공했는데 어떻게 이런 주제에 매료됐나.

 “나에게 기술과 문화는 진작부터 서로 얽힌 주제다. 늘 기술에 관심 있었다. 영문학 대학원 공부도 산업기술이 문화에 미친 영향에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과학은 딴 얘기다. 20대 후반에야 관심이 생겨 신경과학·복잡계이론·진화론 등등에 대한 책을 탐식하듯 읽었다. 내 고등학교 생물 성적을 아는 부모님은 지금 내가 종종 ‘과학 저술가’로 불리는 것에 좀 당혹스러워하신다. (웃음)”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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