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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진정 통일을 원하면 주변국 설득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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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중국 단둥에서 압록강 너머 신의주를 바라보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해방 때까지 외조부모가 사시던 곳이 신의주였기 때문이다. 사업을 하시던 외조부는 해방 후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고향을 떠나셨고 전쟁과 함께 서울에서 부산까지 피란을 가셔야 했다.

(16)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한반도의 평화와 화합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평화·안정에도 중요함 알려야”

 감정을 추스르고 강을 다시 바라봤다. 중국에서 바라본 북한은 생각보다 무척 가까웠다. 손을 뻗으면 곧 닿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을이 되면 아마도 황금빛으로 물들 북한 땅 황금평은 중국 땅에 연륙(連陸)돼 있었다. 단절된 반도의 남쪽에서 ‘섬 사람’처럼 살아온 탓에 우리가 중국과 육지로 연결돼 있다는 그 자명한 사실을 그때야 깨달을 수 있었다.

 강변에 서서 북한 쪽을 바라보면서 강을 사이에 두고 일어난 많은 일이 떠올랐다. 저 강 건너편에서 왜군에 쫓기던 조선의 선조가 강을 건널까 말까 고심을 했고, 그 뒤 명나라의 군대가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내세운 왜군을 치러 이 강을 건넜을 것이다. 해방 이후에는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군대에 쫓기던 마오쩌둥(毛澤東)의 군대가 저 강을 넘어 북한 지역으로 들어가 위기를 모면하고 반격을 도모했을 것이다. 한국전쟁 중에는 유엔군의 반격에 압록강까지 밀린 인민군이 만포대교를 통해 강을 넘어와 숨을 돌리고 전열을 정비했을 것이다. 그리고 곧 펑더화이(彭德懷)가 이끈 ‘중공군’이 ‘조중항미원조(朝中抗美援助)’를 위해 저 강을 넘어갔을 것이다. 이처럼 압록강은 일차적으로는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과 미국 등 동아시아 국가 간 한반도를 둘러싼 갈등과 대립, 평화와 화해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압록강은 한반도의 운명이 이들 주변국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규정돼 왔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압록강의 퇴적으로 중국 단둥과 맞닿아 있는 북한의 황금평(黃金坪), 경계는 눈앞의 철조망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중국 땅에 맞닿아 있는 황금평을 바라보면서 통일 역시 우리만의 일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반도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변화는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북·중 간의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밀접한 영향을 중국에도 미칠 것이다. 이는 물론 현해탄 너머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헤어진 혈육의 재회라는 절절함에도 협소한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방식만으로는 통일은 쉽게 이뤄지기 어려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안중근 의사가 떠올랐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였다. 하얼빈에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그것은 조선의 독립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영을 위한 것이었다는 안 의사의 위대한 꿈과 명분은 지금 바로 우리가 통일을 위해 꼭 필요로 하는 것이다. 남북한의 통일은 갈라진 민족의 재결합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 번영에 기여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보다 보편적인 차원에서 그 의미가 강조돼야 하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독일 통일 역시 같은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통일의 때가 왔을 때, 이를 위대한 게르만족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기회로 간주했다면 연합국은 독일의 통일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국 대처 총리는 독일 통일에 매우 부정적이었고,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은 ‘나는 독일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하나보다 두 개의 독일로 남아 있는 것이 좋다’는 널리 알려진 독설을 내뱉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은 시종일관 통일의 의미를 유럽 통합이라는 틀 속에 자리매김했고, 독일 통일이 유럽 통합의 심화와 유럽 평화에 미치는 중요성을 강조했다. 독일 통일의 성취는 유럽 평화를 강조한 독일의 이러한 자세가 주변국에 의해 수용된 결과였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이뤄진 남북관계나 통일 논의는 대체로 민족주의적 측면이 강조됐다. 남북한이 통일되면 경제력은 얼마나 강해질 것이며, 군사적으로는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가 될 것인가 하는 식의 논의가 그런 것이다. 북한의 갑작스러운 붕괴나 흡수통일에 대한 근거 없는 기대감 역시 한반도 내부만을 바라본 편협한 시각의 발로다.

 진정으로 통일을 원한다면 편협한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남북한 간의 관계 개선, 나아가 통일이 한반도의 평화와 화합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얼마나 중요한 일이 될 것인지 주변국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상적 통일정책·대북정책이 남북한 간의 특수성뿐만 아니라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보다 보편적인 가치와 의미를 구현할 수 있는 방향으로 변화해야 한다.

 어둠이 내린 압록강은 북한과 중국 간의 거리감조차 느낄 수 없게 만들면서 한반도가 주변국과 역사적으로 이어온 그 어렵고도 복잡한 관계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