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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유석 판사의 일상有感

전관예우라는 오명을 씻지 못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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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오는 13일은 ‘대한민국 법원의 날’이다. 가인 김병로 선생이 미 군정으로부터 사법권을 이양받아 초대 대법원장으로 취임한 날이 1948년 9월 13일이다. 그로부터 67년이 지나도록 전관예우라는 오명을 깨끗이 씻어내지 못한 것은 법원의 안이함 때문이다.

 ‘극소수의 잘못에 불과하다, 상대적으로 깨끗하다’는 변명의 안이함이다. 상자에 든 사과 백 개 중 하나가 썩었든 천 개 중 하나가 썩었든 그건 썩은 사과가 든 상자다. 다른 기관과 비교해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법부에 요구되는 엄정함은 비율적인 것도 상대적인 것도 아니다.

 ‘결론에는 영향이 없다’는 말의 안이함이다. 결론에 영향이 있는지 없는지는 판사 마음속에 들어가보지 않는 한 모른다. 당사자는 외관을 본다. 전관이 선임되자 잘 안 받아주던 증거 신청을 받아주거나 종결했던 변론을 재개하면 당사자는 당연히 결론에도 영향이 있었을 거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인지상정’이라는 말의 안이함이다. 한솥밥을 먹던 식구가 어려운 가정 사정 때문에 개업했는데 사소한 절차적 편의 정도는 봐주는 것이 인지상정 아닐까 생각하지만 그것이 당사자에게는 결과도 우대해 주겠다는 신호로 보인다. 개업한 선배가 안부전화를 걸었다가 갑자기 당사자가 너무나 억울해한다며 사건 이야기를 꺼낼 때 야박하게 끊지 못하는 게 인지상정일까. 다른 당사자도 똑같은 기회를 갖지 못하는 이상 불공정한 특혜일 뿐이다. 인지상정과 의리라는 미덕은 저잣거리의 것이지 법관의 것이 아니다.

 ‘시장원칙에 따랐을 뿐이다’라는 말의 안이함이다. 어제까지 판사를 하다가 개업한 후 하루 이틀이면 끝나는 영장실질심사 사건을 수임하며 거액의 성공보수를 약정하고는 시장원칙에 따라 보수가 결정될 뿐이라고 강변한다. 실제로는 결론을 좌우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사람들의 막연한 기대로 거품이 잔뜩 낀 가격을 태연히 받는 것이 시장원칙일까. 능구렁이 사무장이 판검사 접대비로 돈이 필요하다며 어차피 의뢰인이 확인할 도리 없는 돈을 청구하는 범죄마저 벌어질 때가 있는데 이 또한 시장의 수요에 따른 일인가.

 최근 대법원은 형사사건 성공보수 약정은 무효라는 핵폭탄급 판결을 선고했다. 서울중앙지법은 재판부와 연고 있는 변호사가 선임되면 사건을 재배당하는 제도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부작용이 67년간 사법 불신을 초래해 온 안이함만큼 심각할까.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