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만 기적 47년 … 세계 톱10 자동차, 한국 쇳물로 만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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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오전 포스코 광양제철소의 제1고로(高爐). 폭염 속에서 용광로까지 펄펄 끓는다. 무쇠 같은 남자들이 묵묵히 쇳물과 마주하고 있다. 고로는 철광석과 코크스, 석회석을 녹여 쇳물을 만들어내는 제철소의 심장이다. 30층 빌딩(106m) 높이의 1고로는 겉에서 보기엔 가동을 멈춘 공장 같다. 곳곳의 철판은 녹슬었다. 높이 솟은 굴뚝은 검게 그을렸다. 다만 굴뚝에서 쉼 없이 내뿜는 수증기가 공장이 숨 쉰다는 걸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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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로 안으로 들어서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시끄러운 기계 소리와 함께 뜨거운 열기가 ‘훅’ 끼쳤다. 고로 가운데 출선구에선 붉은 쇳물이 콸콸 뿜어 나오고 있었다. 쇳물의 온도는 1510도에 달한다. 우주복을 닮은 은색 방열복 차림의 직원이 말없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36명이 24시간 3교대로 1고로를 지킨다. 1987년 입사한 장순찬 제선파트장은 “하루 1만5000t의 쇳물을 만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용광로”라며 “광복절에도 못 쉬지만 한국 경제를 이만큼 일으켜 세우는 데 기여했다는 자부심으로 일한다”고 말했다.

 92년 준공한 광양제철소는 고부가가치 제품인 자동차 강판 전문 제철소다. 광양제철소는 지난해 폴크스바겐·도요타·GM·르노닛산·현대·기아차 등 글로벌 ‘톱10’을 비롯한 26개 자동차 업체에 830만t의 자동차 강판을 판매했다. 각 업체로부터 ‘우수 공급사’ 또는 ‘미래 전략 파트너사’로 꼽혔다. 비결은 품질이다. 제철소 도금공장 사무실에서 만난 작업자는 숫돌로 철판을 일일이 문지르며 결함을 확인하고 있었다. 일반인의 눈으로는 물론 기계도 볼 수 없는 작은 결함까지 잡아내는 어려운 작업이다. 진광근 포스코기술연구원 연구위원은 “아직 우위에 있긴 하지만 ‘레시피(제품 설계력)’는 이미 중국이 많이 따라왔다. 하지만 숙련된 기술자의 ‘손맛’은 따라잡기 어렵다”며 “수십 년 쌓아온 현장 작업자의 숙련도를 더해 최고 수준의 제품을 만든다”고 설명했다.

 한국 철강산업의 역사는 험난했다. 70년 4월 고(故) 박태준 당시 포항제철(1968년 창립·포스코 전신) 사장이 경북 영일군 동촌동에서 제철소 건설을 위한 첫 삽을 떴다. 이후 연인원 315만4884명을 공사에 투입한 대역사(大役事)가 시작됐다. 전국 각지에서 ‘잘살아 보자’는 일념으로 모인 사내들이 영일만 앞바다에서 모진 모래바람과 사투를 벌였다.

 69년 입사해 포항제철소 부소장까지 지낸 홍상복(71) 삼일그룹 회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현장 사무소는 군대 야전 사령부나 다름없었죠. 책상을 침대 삼아 담요를 깔고 잠을 청했어요. 노란 작업복을 입고 일한 우리를 포항 시민들은 ‘노란 군대’라고 불렀습니다. 모래바람이 불면 숨을 쉴 수도 없었죠. 허허벌판에서 도시락을 먹다 모래가 쌓이면 물을 부어 가라앉힌 다음 먹곤 했습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 또한 큰 힘이 됐다. 그는 65년 미국 존슨 대통령과 만나 제철소 건설을 위한 자금·기술 지원을 요청하는 등 직접 뛰었다. 박태준 사장이 “정치권의 압력을 배제하고 설비 공급자 재량권을 갖게 해달라”고 건의하자 친필로 사인한 ‘종이 마패’를 건네 힘을 실어줬다.

 착공한 지 3년2개월 만인 73년 6월 9일, 국내 최초 용광로인 1고로를 준공했다. 포스코 직원들은 한국이 철강 주도권을 갖도록 한 포항 1고로를 ‘민족(民族) 고로’라고 부른다. 포스코는 연구개발(R&D) 투자로 ‘100년 기업’의 기틀을 닦고 있다. 중국과 격차를 벌리려면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만이 살길이란 판단에서다. 철광석·유연탄을 예비처리하지 않고 고로에서 직접 쇳물을 뽑는 파이넥스(FINEX) 공법은 포스코 기술연구원 설립(77년)→포스텍 개교(86년)→포항산업과학연구원 설립(87년)으로 이어간 R&D 투자의 집약체다. 지난달엔 고속 주조를 통해 기존보다 에너지 사용량을 30% 이상 절감하면서도 기존보다 얇고 강한 철강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압축연속주조 압연설비’(CEM) 기술을 독일 엔지니어링 업체인 SMS에 수출했다.

 현재 한국 철강업은 맏형인 포스코를 비롯해 현대제철·동국제강·세아베스틸 등 주요 30여 개 업체들이 포진해 있다. 현대차그룹 계열사인 현대제철의 경우 업계 2위로 차량 경량화를 위한 제품 등에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세아베스틸 역시 전북 군산의 연구소에서 특수강을 연구하고 있다.

 문제는 세계적으로 제품 공급이 과잉이라는 점이다. 김주한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철강 소재가 보다 고급화·다양화해야 한다”며 “전기차·수소차 등 혁신 자동차의 수요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라”고 주문했다. 다양한 분야에서 기술 개발을 시도해 약점을 줄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연세대 민동준(신소재공학) 교수는 “건설사들이 플랜트(공장)를 많이 짓는데 크롬강·니켈강 등 합금강은 우리가 제대로 못 만든다”며 “성공하기 쉽지 않아 개발을 기피하는 만큼 정부가 인센티브 등으로 신기술을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김준술(팀장)·함종선·문병주·황의영·김기환·임지수 기자 jso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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