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글씨 해임서 나온 날, 신동빈 L투자회사 10곳 대표 등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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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빈 회장

형(신동주)이 아버지(신격호)가 서명했다는 ‘손글씨 해임서’를 공개한 날, 동생(신동빈)은 조용히 최대주주 회사의 대표가 되는 법적 절차를 마쳤다.

 신동빈(60) 롯데그룹 회장이 한국롯데의 지주회사 격인 호텔롯데의 지분 72.7%를 가진 일본 ‘L투자회사’의 대표이사가 돼 이미 등기까지 마친 것이 확인됐다. 6일 본지가 입수한 일본 법무성 법무국의 회사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신 회장은 지난달 31일 L투자회사 12곳 중 10곳의 대표이사로 등재됐다. 이날 법무국은 본지에 “나머지 두 곳(L제3·L제6투자회사)도 지난달 31일 등기 수정을 요청해 반영 중”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신 회장은 12곳 모두를 장악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존 대표이사는 신격호(94) 롯데그룹 총괄회장과 전문경영인으로 이번에 신동빈 회장을 지지한 쓰쿠다 다카유키(佃孝之·72) 일본롯데홀딩스 사장이 회사별로 나눠 맡고 있었다.

본지가 6일 일본 법무성에서 발급받은 L제2투자회사의 등기부등본. 대표이사가 신격호(일본 이름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 혼자였는데 7월 31일 신동빈(시게미쓰 아키오·重光昭夫·빨간 선)이 등재됐다.

신격호 총괄회장이 지난달 28일 ‘손가락 해임’ 했던 고바야시 마사모토(小林正元·롯데홀딩스 재무책임자 겸 한국 롯데캐피탈 대표) 전무, 가와이 가쓰미(河合克美·마케팅 총괄) 상무 등 일본 롯데홀딩스 이사 4명도 신동빈 회장과 함께 L투자회사 이사로 등재됐다. 쓰쿠다 사장은 대표직을 신 회장에게 넘기면서 이사직에서도 사임했다.

 L투자회사는 주식회사 L제1투자회사, L제2투자회사 등 1부터 12까지 번호를 매긴 12개의 회사를 통칭하는 말이다. 대부분 일본 롯데상사·리스·데이터센터 등 기존 회사에서 변경됐으며 자본금 1000만~8000만 엔(약 9400만~7억5000만원) 규모다.

 지금까지 L투자회사는 신격호 총괄회장의 개인 회사에 가깝다고 알려졌다. 이 때문에 신동빈 회장이 일본롯데홀딩스 주주총회에서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경영권 확보는 못할 수 있다는 시각도 있었다. 하지만 신 회장이 이미 법적으로 L투자회사의 대표권까지 확보해 경영권 분쟁에서 유리한 고지에 선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신 회장이 L투자회사의 대표에 취임한 것은 일본롯데홀딩스 대표 취임 보름 전인 6월 30일이다. ‘한·일 원 리더(One Leader)’를 공식적으로 표방하기 전 미리 정지작업을 다 해놓은 셈이다. L투자회사는 평소 2년에 한 번씩 5~6월께 대표이사를 재선임했다. 선임 이후 등기까지 마치는 데 통상 2~3개월 걸렸다. 그러나 신동빈 회장의 대표 등기는 불과 한 달 정도 만에 끝났다. 신격호 총괄회장이 일본롯데홀딩스를 갑자기 찾아와 신동빈 회장과 쓰쿠다 사장을 ‘손가락 해임’하는 등 상황이 급박해지자 법적 절차를 서둘러 마무리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연말까지만 해도 신동주(61)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은 신동빈 회장보다 L투자회사 경영권 확보에서 앞서 나간 것으로 보인다. 신 전 부회장은 10개의 L투자회사 중 8곳에 이사로 이름을 올렸다. 신동빈 회장(4곳)의 두 배다. 특히 L4·L5 등에는 아버지 신격호 총괄회장도 없이 혼자만 이사 겸 대표로 이름을 올렸다. L4는 호텔롯데의 2대 주주(15.63%)다. 그러나 신동주 전 부회장이 일본 내 주요 보직에서 모두 해임되면서 쓰쿠다 사장이 이들 회사의 대표직을 물려받았고, 이 자리를 다시 신동빈 회장에게로 넘겼다.

 지난달 31일 신동주 전 부회장은 다른 사람이 손글씨로 본문을 쓰고 부친 신격호 회장이 서명하고 도장을 찍었다는 문서를 공개했다. 신 전 부회장을 한국롯데 회장에 임명하고 신동빈 회장을 해임한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신동빈 회장은 “법적인 효력이 없는 서류”라고 일갈했다. 해당 문서가 공개된 날, 신동빈 회장은 L투자회사의 법적 대표가 됐다.

 신동빈 회장이 L투자회사의 대표이사가 됐다고 해서 롯데홀딩스 주주총회에서 반드시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다. 대표이사 등재와 별개로 L투자회사의 대주주는 여전히 신격호 총괄회장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롯데알미늄(34.9%)과 롯데로지스틱스(45.3%)의 최대주주인 L제2투자회사의 주소는 일본 도쿄(東京) 시부야(涉谷)의 신격호 총괄회장의 일본 자택 주소와 같다.

 한편 신동빈 회장과 신동주 전 부회장은 이날도 침묵했다. 신동빈 회장은 지하 주차장을 통해 출근한 이후 회사에 머물렀고, 신동주 전 부회장은 두문불출했다.

구희령·이현택 기자 hea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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