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모국 온 미국 다이빙 영웅 교포 새미 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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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2010년 동계올림픽이 강원도 평창에서 열리고 남북 단일팀이 많은 금메달을 따는 것을 생전에 꼭 보고 싶습니다."

1948년 런던올림픽과 52년 헬싱키올림픽에 미국 선수로 참가해 다이빙 10m 플랫폼 부문에서 2회 연속 금메달을 따내 미국 스포츠계의 영웅이 된 교포 새미 리(83). 그가 인생의 황혼기에 한국의 동계올림픽 유치를 지원하는 것으로 모국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지난 8일 방한한 새미 리는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려는 평창을 12~13일 이틀간 방문해 유치활동 상황을 알아볼 예정이다.

"분단된 한국에서 동계올림픽이 개최되면 평화와 화합이라는 올림픽 정신을 세계에 알리는 데 효과 만점이라는 점을 국제 스포츠계 인사들에게 홍보하겠습니다."

새미 리는 미국 이민 1백년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한국인으로 손꼽힌다.

무엇보다 작은 키(1백58㎝)와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유년기.청년기의 아픔을 딛고 미국에서 동양인 최초로 수영 다이빙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미국 최고의 아마추어 선수에게 주어지는 제임스 설리번상을 수상한 유일한 동양계 선수이기 때문이다.

새미 리는 1920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태어나 LA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1905년 하와이로 건너갔다가 2년 만에 캘리포니아에 정착했다. 그는 어린 시절 일본인에 대한 적대감이 어느 누구보다 컸다고 한다.

"다섯 살 때 아버지로부터 '1919년 3.1운동 때 수많은 조선 학생이 일본군에 의해 비참하게 죽고 폭행당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이튿날 아침 부엌칼을 들고 일본인이 사는 옆 집에 찾아가 '당신들을 죽이겠다'고 소동을 피웠습니다."

또 10살 무렵 전학 온 일본인 학생을 보자마자 '아버지 원수의 나라 사람'이라고 여겨 주먹으로 얼굴을 때려 기절시키기도 했다. 이후 한번도 학교 성적에서 우등을 놓치지 않았고, 중.고등학교 때 학생회장에 출마해 당당히 당선됐다.

다이빙과의 인연은 우연히 시작됐다. 32년 LA올림픽 개최 직전 아버지와 함께 트럭에 야채를 싣고 LA콜로세움경기장을 지나가게 됐다. 경기장 주변에 오색찬란한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보고 "저 깃발들이 무엇이냐"라고 물었다.

아버지는 "곧 올림픽이 열린다. 최고의 선수들에게 올림픽 종목과 연도가 새겨진 금메달을 준다"고 설명했다. 이윽고 새미 리는 "나도 언젠가는 올림픽 챔피언이 되겠다.

앞으로 금메달을 딸 종목을 찾아 보겠다"고 대답했다. 같은 해 새미 리는 우연히 흑인 친구의 도움으로 학교 수영장에서 난생 처음 다이빙을 시도했다.

그런데 그날 자신도 놀랄 만큼 멋지게 한바퀴 반을 돌고 머리부터 물 속으로 들어갔던 것. 이후 아버지는 의대에 진학하는 조건으로 아들의 다이빙 훈련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중학생 때 여자친구 생일 파티에 초대됐는데 시간이 지나도 파티가 시작되지 않았어요. 친구 부모가 유색인종인 저 때문에 파티를 시작하지 않았던 것이죠. 집에 달려가 아버지한테 '난 왜 한국인으로 태어났느냐'고 투덜거렸죠. 아버지가 '네가 한국 조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데 어떻게 당당한 미국인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느냐'고 하셨죠. 떳떳한 미국시민이 돼 자식들에게 아픔을 물려주지 말라고 당부하셨어요."

그는 46년 남가주대 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40여년간 이비인후과 전문의로 일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한 주한미군이 e-메일을 통해 '지휘관이 혼자서 외출하면 위험하니까 항상 여럿이 같이 다녀야 한다고 말했다'고 알려와 마음이 아팠습니다. 젊은 세대가 한국전에 참가해 피를 흘린 미국을 너무 냉대하는 것 같아서요. 혹시라도 세계 언론에 반미 운동이 보도돼 평창의 올림픽 유치에 부정적으로 작용할까봐 걱정입니다."

글=하재식,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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