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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한국의 미래는 수능제도에서 해방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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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곽병선
한국장학재단이사장
전 한국교육학회 회장

만사는 사람에게 달렸다. 국가 경영도 그 최고의 목표는 국민의 인간적 자질을 키우는 것이어야 한다. 나라의 흥망성쇠는 바로 그 국민들이 발휘하는 품성과 역량에 달렸기 때문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남들이 인정하는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이 배경에는 남다른 교육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교육 시스템으로 우리의 미래를 대비할 수 있을까. 크게 두 가지가 걸린다. 첫째는 창의교육이 안 되고 있는 점이다. 미래 변화에 대비해 여러 첨단 분야를 이끌고 세계시장을 주도할 위치에 오를 수 있는 발군의 인재들을 길러내야 한다. 1990년대 이후 20여 년 동안 일본은 2∼3년 걸러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있다. 그 이전까지의 수상자 수를 합하면 총 19명이나 된다.

 둘째는 성적순에 따라 의학·법학 등 특정 분야로의 인재 쏠림이 심하다. 후진적 학벌사회의 어두운 단면이다. 어느 분야에서든지 적성과 소질을 살려 진출하면, 당당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성숙하고 균형 잡힌 사회로 바뀌어야 한다. 교육을 기존 사회구조를 떠받치는 수동적 역할에 둘 것인가, 아니면 왜곡된 사회 개혁의 지렛대 역할을 하게 할 것인가는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문제다.

 이러한 교육 문제의 중심에 대학수학능력시험 제도가 있다. 이 수능문제 해법을 놓고 우리 사회엔 교육 불통(不通)이 있다. 한쪽에선 수능을 어렵게 출제하라고 한다. 그래야 학생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고, 대학에선 변별력이 생겨나 학생선발이 용이하다는 것이다. 다른 쪽에선 수능을 쉽게 출제하라고 한다. 그래야 학생들이 여유를 가지고 전인발달 경험과 자기 적성 계발에 관심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육당국이 어떤 방향으로 수능제도를 운영하든 언제나 반대의 목소리가 나온다.

 필자가 보기에 어느 쪽도, 앞에서 언급한 우리 교육이 안고 있는 근본 문제에 대한 해답이 안 된다. 어려운 수능시험 출제가 창의 인재 육성을 촉진한다는 논리적·실증적 근거는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려운 출제일수록 학생들은 시험공부 압박을 받게 되고, 결과적으로 인재 쏠림, 전공분야 줄 세우기는 더욱 악화될 것이라는 점은 예상할 수 있다. 수능을 쉽게 출제한다고 하더라도 대학들이 수능점수를 입시전형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한 수능이 교육 전반에 미치는 효과는 출제를 어렵게 하는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어느 쪽도 창의성 떨어지는 교육이나 인재 쏠림과 같은 우리 교육의 고질적 난제를 극복하는 대안이 될 수 없다. 지금의 교육체질을 근본적으로 고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예컨대 과학의 경우 과학 교육의 핵심인 실험실에서 씨름하는 학생은 실력 있는 학생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수능출제 예상문제집을 놓고 정답 맞히기를 연습하는 것이 유리하다. 이런 제도로 과학의 대가들이 나오길 기대할 수 있을까. 글로벌 과학 경쟁에서 백전백패할 것이 뻔하다. 과학뿐 아니라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다.

 이런 교육 불통의 해법을 찾으려면 근본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은 수능출제 난이도 조절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수능제도를 성역화하고 있는 기득권 수호 세력에 언제까지 끌려다닐 것인가. 내 자식, 내 학교 유불리에 집착해 교육정책을 답보시키는 근시안적 태도에 묶여 있을 때가 아니다.

 우리의 대안은 교육불통을 넘어설 수 있는 거시적이고 총체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학생 각자가 달리고 싶은 방향으로 최선을 다해 달릴 수 있도록 돕고, 그 달린 만큼 인정해 주는 제도여야 한다. 학생들의 실력은 시험예상문제 정답 찍기 연습에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교실·실험실·운동장·지역사회에서 기초훈련, 토론, 실험, 봉사, 체험 활동을 통해 길러져야 한다. 그러려면 학생들을 시험의 굴레에서 벗겨주어야 한다. 모든 학생을 하나의 시험 제도에 종속시켜서는 안 된다. 어쩌면 바둑, 골프, 야구, 수영과 같은 분야에서 수능제도가 있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세계 수준의 선수들이 길러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수능제도를 유지하더라도 고졸학력을 갖추었는지만 따져야 한다. 수능 출제 수준을 확 낮춰 시험 준비로 자기 계발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학생 개개인의 실력은 누구보다 그 학생을 잘 아는 교사가 평가하게 하는 게 맞다고 본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룩한 성과는 따라잡기 교육으로 이룩한 것이다. 그러나 가보지 않은 미래의 새로운 길을 뚫고 나갈 인재들을 기르는 교육은 지금의 수능제도로는 안 된다. 학생들이 길러야 할 성취 기준을 세워주고, 교사들에게 그 기준을 관리하도록 하고, 사회가 이를 신뢰해주는 제도로 나가야 한다고 확신한다. 독일의 교육제도는 우리가 참고할 만하다. 다양성이 길러지고, 창의가 자극을 받도록 하고, 그 누구도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는 일이 적도록 해야 한다.

곽병선 한국장학재단이사장·전 한국교육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