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득의 행복어사전] 욕실의 용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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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은 다용도실이다. 몸을 씻는 일 외에 여러 용도로 사용되는 곳이다. 우선 욕실은 우는 곳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그런 장면들이 자주 나온다.

울기 위해 욕실로 뛰어들어가는 인물들. 가장 인상 깊은 건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서 세라가 욕실에 들어가 샤워기를 틀어놓고 쪼그려 앉아 우는 장면이다. 영화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장면을 떠올리면 지금도 머리 위에서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슬픔이 온몸을 적신다.

욕실은 노래방인지 모른다. 아들은 평소에는 노래를 즐겨 부르지 않지만 욕실에서 샤워할 때면 자주 흥얼거린다. 그 소리는 뭐랄까, 아들이 듣는 전자음이 반복되어 나오는 음악을 닮았다. 아내는 귀신 나올 것 같은 소리라며 제발 밤늦게 샤워할 때면 자제해 달라고 당부하지만, 부당한 요구라며 아내의 자제는 계속 흥얼거린다. 어쩌면 아들은 우디 앨런이 감독한 영화 ‘로마 위드 러브’에 나오는 미켈란젤로의 아버지처럼 엄청난 음악적 재능을 가진 사람인지도 모른다. 샤워할 때만 노래를 잘 부르는.

남편은 운동을 싫어한다. 운동 후의 땀과 가쁜 호흡과 근육통을 싫어한다. 꿈도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그에게 만일 삶의 목표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든 몸의 움직임을 최소화해서 사는 것이다. 그런 그도 욕실에 들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을 볼 때면, 그러니까 지나치게 중력친화적인 자신의 가슴과 뱃살과 샤워기의 호스보다 가느다란 팔다리를 볼 때면, 자신도 모르게 맨손체조 비슷한 동작을 하고 만다. 그런 동작을 할 때의 남편은 진지하고 심각한데다 우수마저 깃든 얼굴이라 수건을 수납하기 위해 욕실 문을 연 아내를 기겁하게 만든다. 남편에게 욕실은 체육관이다.

욕실은 연구실이기도 하다. “유레카! 유레카!”를 외치며 벌거벗은 채 거리로 뛰어나간 아르키메데스가 그 유명한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발견했다는 곳도 욕실이었다. 아내는 아르키메데스의 후예인지도 모르겠다. 아내는 욕실에 들어가면 생각한다. 평소에도 생각하겠지만 욕실에서 샤워할 때면 더 격렬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처럼 생각들이 아내를 향해 쏟아지는 것일까?

아내가 샤워할 때 남편은 소파에서 책을 읽는다. 남편이 윤이형의 『개인적 기억』을 펼치고 물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첫 문단을 읽기 시작했을 때 아내가 남편을 부른다. 욕실 문을 열면 아내는 자신에게 떠오른 생각들을 남편에게 쏟아낸다.

그것들은 가령 베란다에 있는 빨래를 걷어라, 냉장고에서 포도를 꺼내 식초 뿌린 물에 담아두라, 같은 일상의 가사에 대한 것이지만 또 일본에 있는 둘째에게 전화를 해보라, 아직 들어오지 않은 첫째에게 문자를 해보라, 문단속을 하라, 가스 밸브를 점검하라 같은 안부나 안전을 확인하는 요청이 대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욕실은 가족의 안전을 지키는 컨트롤타워다.

아내는 남편이 전혀 모르는 것을 질문하기도 한다. 마르크스의 『신성가족』에 나오는 ‘비판적 비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찾아보라든지 그리스 사태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것이 왜 지금 욕실에서 아내는 궁금한 것인가 라는 질문은 글쎄, 아르키메데스를 안다면 할 수 없는 질문이다.

아르키메데스를 모르는 남편은 아내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아내의 대답은 이랬다. 첫째, 샤워하는 동안 해야 할 많은 일들, 궁금한 것들이 마구 떠오른다. 둘째, 그 일들을 하고 싶고 궁금한 것들을 찾아보고 싶지만 당장은 샤워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 셋째, 샤워를 하고 나서 하면 되겠지만 샤워 후 몸에 물기 마르듯 그 생각들은 금세 사라져버린다. 넷째, 그러니까 생각났을 때 바로 남편에게 말하는 수밖에 없다.

물론 아내가 부탁하고 요구하는 일은 대부분 남편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고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다. 다만 책을 읽을 때, 그러니까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상태에서 그런 요청을 받는 일이 좀 귀찮을 뿐이다. 남편은 아예 소파로 돌아가지 않고 욕실 앞에 서 있다. 아내가 묻는다. 당신 왜 안 가고 거기 서 있어? 어차피 또 부를 거잖아. 아니 안 부를 테니 가서 쉬어요. 정말이지? 그럼요. 약속하지? 그럼요.

남편은 거듭 다짐을 받고는 소파로 돌아온다. 다시 책을 펼치고 두 번째 문단을 읽기 시작했을 때 아내가 남편을 찾는다. 남편은 화가 난다. 왜? 안 부른다고 했잖아. 아니 아직도 거기 서 있나 궁금해서.
욕실은 대화방이다.

욕실 : 노래방, 체육관, 컨트롤타워, 대화방

김상득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에 근무하며, 일상의 소소한 웃음과 느낌이 있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아내를 탐하다』『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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