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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다산초당에서 정약용과 마주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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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동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신경외과학

메르스 사태에 다산 정약용을 떠올린다. 25년 전께 멀리 전라남도 강진을 다녀온 적이 있다.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부부가 함께 남도를 두루두루 떠돌아다닌 여름 휴가길이었다. 잠시 한나절을 다산초당 근처에 머물렀을 뿐인데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큰 바위에 ‘정석’(丁石)이라 새겨 넣은 당당한 다산의 글씨 하며,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이 품위를 더하는 숲 속의 단아한 두 채의 기와집이 왠지 사람의 마음을 잡는다. 야트막한 야산이지만 천일각에서 바라보는 탁 트인 전경도 일품이었다.

 초당지기는 방으로 들어와 차 한잔하고 가라며 채근했다. 다산 선생의 학구열을 애들에게 전해주라는, 속아줄 수밖에 없는 실없는 소리에 초당에 올라 다산과 마주 앉았다.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이 우리나라 최고의 사상가요 지성인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젊은 시절 그는 정조의 든든한 후원을 받아 마음껏 뜻을 펼쳤다. 한강에 배다리를 놓았으며 수원성 건축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탐관오리도 단호히 처벌했다. 하지만 이런 올바른 자세가 정조대왕 사후 순조 1년에 발생한 신유사화 때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정순대비 일파에게 숙청당하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우리가 다산을 더욱 기억하는 까닭은 그의 고난 때문이다. 형 약종과 매형 이승훈은 천주교인이라는 이유로 참수를 당했다. 다산 형제는 겨우 생명을 부지했지만 길고 긴 귀양길에 오른다. 후일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도감인 자산어보를 집필한 손암 정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학자로서 황금기를 보내게 될 강진으로 유배됐다. 눈물로 헤어진 형제는 이후 이승에서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18년간의 모진 귀양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는 다산의 마음가짐은 화려한 역사적 부활의 원동력이 되었다. 경세유표, 목민심서를 비롯해 수백 권의 책을 편찬하는 초인적 능력을 보여준 것이다. 당시의 중죄인이던 다산은 훗날 뭇사람의 귀감으로 완벽하게 탈바꿈했다.

 다산의 이야기를 더듬어가다 보면 그가 너무 고지식한 사람이라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옳지만 힘든 인생길을 골라서 걷는 그의 성품 때문이다. 그러나 놓쳐선 안 될 대목은 아무리 어려워도 다산은 나라 사랑과 백성을 위한 무조건적 희생정신을 잊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실질적인 지식을 전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며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필자는 의사다. 의사 가운을 입은 뒤 지난 6월처럼 잔인한 시간은 없었다. 느닷없이 찾아온 메르스라는 전염병으로 한 달 넘게 나라가 큰 홍역을 치렀다. 알려진 지 얼마 안 된 생소한 질병이라 의학 지식에 대한 확실한 정보가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메르스 같은 공포스러운 전염병은 의사들만으로 진압하기 어렵다. 이번 사태에서 가장 뼈아픈 것도 국민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진솔한 마음의 지도자가 눈에 띄지 않아 사람들이 갈피를 잡지 못했던 점이다. 만약 다산처럼 진정으로 함께 걱정하고 행동하는 지도자들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유난히 일찍 찾아온 더위 때문인지 25년 전 뜨거웠던 여름에 걸었던 다산초당 부근의 동백숲이 그리워진다. 백일홍이 운치 있는 백련사 오솔길의 시원함과 초당 방바닥에 주저앉아 음미하던 은은한 향의 차도 새삼 생각난다. 다산은 외로운 귀양 생활 중에 백련사 혜장 스님과 함께하는 향기로운 만덕산의 차가 커다란 즐거움이었다고 한다.

 다행히 메르스 사태가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무거운 방호복을 입고 사투를 벌였던 우리 병원의 동료 의사·간호사들도 간신히 한숨을 돌리는 분위기다. 이제 모두들 메르스 후유증을 툴툴 털어버리고 마음껏 여름 휴가를 떠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도 메르스 충격에서 벗어나 정상으로 돌아오고 말이다. 만약 필자에게도 이번 여름에 그럴 짬이 주어진다면 다시 한번 그곳에 가고 싶다. 강진의 초당에 들러 뜨거운 차 한 잔을 놓고 다산과 마주하고 싶다.

 김동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신경외과학

◆약력=독일 쾰른의과대학 교환교수·서울대 의대 신경외과학교실 주임교수·서울대병원 의생명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