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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뉴스를 ‘남의 일’로 치부하는 당신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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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신예리
신예리 기자 중앙일보 차장
신예리
JTBC 국제부장
밤샘토론 앵커

암행어사는 아니지만 웬만해선 낯선 이에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소설가들과 비슷한 이유에서다. 소설 쓴다고 말을 꺼내는 순간, 자기 인생이 너끈히 장편소설 한 권감이란 사람들이 줄을 선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기자라고 하면 대뜸 좋은 기삿거리를 주겠다며 속사정을 털어놓는 분들이 적지 않다. 귀 기울여 들어야 도리이겠지만 바쁘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운 직업이라 번번이 시간을 내드리긴 힘든 게 사실이다. 간혹 열심히 듣고 나선 아무래도 기사로 쓰긴 힘들겠단 말을 해야 하는 송구한 일도 벌어진다. 그러다 보니 “무슨 일 하느냐”에 십중팔구는 “글 써요” 또는 “공부해요”라며 둘러대곤 하는 거다.

 몇 번인가 외국 출장길의 기억을 떠올려도 사람 사는 모습, 세상 어디나 비슷했다. 기자라고 밝히는 순간 금세 “내 얘기를 좀 들어달라. 그리고 널리 알려달라”는 청이 돌아왔다. 여러 해 전 필라델피아 방문길에 탔던 택시기사 역시 그랬다. 아프가니스탄 출신 이민자라던 그는 소설 『연을 쫓는 아이(할레드 호세이니 저)』를 읽어봤느냐고 물었다. “아직…”이라고 말을 흐리자 호텔부터 공항까지 40분 남짓 동안 쉴 새 없이 많은 얘길 들려줬다. 외세의 각축장이 되어 찢기고 갈라진 아프간의 역사, 그런 비극의 사생아로 태어난 탈레반의 악행, 그 아래서 고통 받는 동포들에 대해. 그의 절절한 호소에 무책임한 약속을 하고 말았다. 책도 꼭 읽고 기사도 써보겠다고.

 하지만 난 약속을 절반밖에 지키지 못했다. 문제의 소설은 영문판을 구해 단숨에 읽어버렸다. 명색이 기자인데 여태 아프간의 아픔을 눈여겨보지 못한 게 부끄럽고 미안했다. 그럼에도 기사는 끝내 내보낼 수 없었다. ‘기자들의 천국’이라 불릴 만큼 연일 기삿거리가 쏟아지는 대한민국 아닌가. 국내 뉴스도 넘쳐나는 판에 해묵은 남의 나라 일에 관심을 갖자고 했다간 뜬금없는 소리로 치부될 게 뻔했다.

 그런데 얼마 후 2007년 7월, 날벼락 같은 일이 터졌다. 바로 그 아프간에서 우리 국민 23명이 탈레반에 납치된 거다. 두 명이 살해되고 나머지 21명이 차례차례 풀려나기까지 한 달여. 국제부 기자였던 나는 매일 야근하며 피 말리는 속보를 전해야 했다. 마지막 남은 7명이 풀려나던 8월 31일 이른 새벽, 인질 중 한 명과 어렵게 통화를 했다. “산 속에 갇혀 지냈어요. 탈레반 4명이 아직 지키고 있어서 길게 말하긴 힘들어요….” 숨 가쁘게 1면 머리기사를 넘기고 나자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그 순간 잊고 있던 필라델피아의 택시기사가 떠올랐다. 만약 그와의 약속을 마저 지켰더라면, 혹시라도 그들이 아프간에 찾아갈 생각을 접게 만들 수 있진 않았을까.

 미국의 정치학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2012년 저서 『전략적 비전』에서 미국 사회의 6대 문제 중 하나로 ‘세계에 대한 무지’를 꼽았다. 미국 방송과 신문들이 국제 뉴스를 거의 싣지 않다 보니 미국인들은 다른 나라 사정에 도통 무관심하다는 거다. 세계 지도를 보여줘도 대부분 이라크나 아프간이 어디 붙어 있는지조차 모른다고 했다. 그렇게 철저한 무지 속에 전쟁을 벌였기에 미국은 수천 명의 희생과 수천 조원의 비용을 치를 수밖에 없었던 건 아닐까.

 우리도 별로 나을 게 없다. 여전히 국제 뉴스는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한다. 사람이 몇 십 명씩 죽어도 기사가 ‘킬’ 되기 일쑤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도 그랬다. 메르스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기승을 부려 올 2월에만 30명이 숨졌다는 소식이 외신에 떴다. 우리나라에서 첫 확진환자가 나오기 두 달 반 전의 일이다. 하지만 기사화하지 못했다. 그동안 메르스 사태가 터진 뒤 도대체 뭘 했느냐고 정부를 입 아프게 질타했었다. 이제 나부터 반성해야 할 것 같다. 과연 내가 할 일은 다 했던 건지.

 메르스 이전과 이후는 달라져야 한다고들 한다. 위생 관념도, 방역 체계도 싹 바뀌어야 할 거다. 이참에 한 가지 더. 먼 나라 일이라고 무조건 남의 일로 여기는 세태도 좀 변했으면 좋겠다. 날마다 편집 회의에서 치이는 국제부장이라서 하는 얘기만은 결코 아니다.

신예리 JTBC 국제부장 밤샘토론 앵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