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 칼럼] 그리스사태가 역설하는 연금의 중요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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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경제선임기자

그리스의 사실상 국가부도 사태가 표면화된 지난 1일 아테네 시내에서 찍힌 사진 한 장의 인상은 강렬하다. 아테네의 한 은행에서 연금 수급자들이 번호표를 받으려고 필사적으로 손을 뻗치는 장면이다. 북새통은 그리스 정부가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카드가 없는 연금 수급자를 위해 은행 지점 1000여 곳을 다시 열게 하면서 벌어졌다. 이는 복지 포퓰리즘이 불러온 재앙의 생생한 단면이다. 유토피아 수준의 복지제도를 누리던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아비규환 같은 현장에 달려나와 앞다퉈 번호표를 받으려고 발을 동동 구르는 처지로 전락했다.

이들은 그간 자신들이 한낱 유토피아에 살았다는 걸 알았을까. 유토피아는 그리스어로 ‘없는+장소’의 합성어다. 능력도 없으면서 펑펑 돈을 써댄 댓가는 혹독할 수밖에 없다. 사실상 국가부도가 발생한 첫날 아테네 시내에선 한 시민이 길거리에 있는 쓰레기통을 뒤지는 장면도 카메라에 잡혔다. 연금파티를 벌이다 하루 아침에 바닥에 떨어진 그리스인의 구질구질한 삶을 상징하는 사진이다.

그리스 사태는 연금의 중요성 절감시키는 사건

연금 파티를 벌일 수 있었던 밑천은 방만한 재정이었다. 부족한 돈은 빚을 끌어와 충당했다. 그 결과 경제 규모(GDP) 대비 국가부채가 200%에 육박하게 됐다. 여기에 유로존 가입은 국가 경쟁력 약화를 가속했다. 그러다 2009년부터 한계를 드러내고 돌려막던 빚을 갚지 못하면서 사실상 국가부도에 직면하게 된 게 그리스 사태의 골자다. 국제통화기금(IMF)에서 지원받은 15억4000만 유로(약 2조원)를 지난달 30일 갚지 못한 건 디폴트(채무불이행) 사태의 시작에 불과하다. 퇴직 후에도 30년 안팎을 살아가는 반퇴시대에 화수분인줄 알았던 연금이 끊기면 어떻게 될까. 그리스와 한국은 사회환경이 다르지만 고령화로 인해 퇴직 후 인생이 길어졌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그리스 사태는 퇴직 후 연금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리스와 한국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리스는 국가 주도의 연금시스템이고 한국은 개인이 스스로 노후를 만련해야 한다는 차이점 뿐이다. 국가가 준비해주지 않으면 개인이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리스사태가 보여주듯 국가는 개인의 노후를 완벽하게 책임져주지 못한다.

퇴직 후 30년 사는 반퇴시대에는 연금이 생명줄

특히 한국에선 연금의 보호장치가 취약하다. 한국에선 연금이 투 트랙 방식인데 일반 국민에 대해서는 ‘저부담ㆍ저복지’, 공무원에 대해서는 ‘저부담·고복지’의 연금체제가 운영되고 있다. 공무원연금은 부담에 비해 혜택이 과도해서 지속가능성이 우려되고 있다. 이미 고위공직자는 퇴직 후 매달 500만원 이상 받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그리스의 연금 파티를 남 일로만 여길 게 아니란 얘기다.

현재 우리 국민은 세금을 통해 매일 100억원을 공무원 연금으로 보전해주고 있다. 이게 2020년에는 하루 300억원으로 늘어난다. 그래서 공무원 연금 보전액은 올해 처음으로 연간 3조원이 넘어서고 2020년에는 6조원이 넘어선다. 이후에는 더 가시적으로 증가한다. 공무원연금을 처음 설계했던 1960년에는 기대수명이 52세였지만 지금은 82세로 높아지면서 퇴직 후 연금을 받는 인구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때문이다. 공무원이 당장이 연금 덕을 보겠지만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얘기다.

한국인 상당수가 노후에 잠재적 연금위기에 노출

이에 비해 일반 국민에 대한 공적연금인 국민연금은 저부담ㆍ저복지 방식이다. 조금 부담하고 조금 받게 돼 있다. 그래서 일반인 상당수는 연금으로 노후를 보장받기 어렵다. 국민연금은 수급액이 재직 중 받는 소득의 40% 수준이다. 그래서 국민연금 수급액이 평균 80만원가량에 그치고 있다(이에 비해 공무원연금은 200만원가량이다). 경제활동인구 2600만명 가운데 상당수가 ‘연금푸어’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갑자기 연금을 삭감당하거나 못 받고 있는 그리스인과 처지가 다르지 않다.

왜 그런지 보자. 경제활동인구 가운데 실업자 100만명을 빼면 2500만명이 일을 한다. 여기서 700만명 가량이 자영업자이고 1800만명 가량이 임금근로자로 분류된다. 자영업자는 자발적으로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않으면 공적연금을 받지 못한다. 전문직과 고소득 자영자를 뺀 상당수 영세 자영업자는 연금의 사각지대라고 봐야 한다. 임금근로자는 정규직 1200만명을 제외한 나머지 600만명이 비정규직이다. 이들 상당수 역시 국민연금의 보호 범위 안에 있다고 보기 어렵다. 더구나 정규직 가운데서도 소득 수준이 낮은 근로자는 노후를 의존할만한 수준의 국민연금을 받기는 어렵다고 봐야 한다.

한국에선 국민연금 불충분해 각자도생 나서야

이런 식으로 보면 문제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스는 국가 차원에서 재정이 고갈돼 위기를 맞았다. 한국은 재정이 상대적으로 안정돼 있지만 고령화 여파로 개인은 갈수록 장수리스크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대안은 각자도생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스사태를 보더라도 어디에선가는 연금이 나와야 노후 생활이 되는데 그러려면 공적연금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이 많은 한국에선 스스로 노후를 준비해나가야 한다는 얘기다. 재취업해서 소득 기간을 늘리는 것도 중요한 대안이지만 그것도 체력과 전문성이 뒷받쳐줄 때만 가능하다. 이미 퇴직한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현업에 있을 때 하루라도 빨리 연금을 부어야 각자도생할 수 있다는 게 그리스사태가 주는 교훈이 아닐까.

김동호 경제선임기자 dong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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