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기반장’ 왕치산 “썩은 나무 뽑되 숲 살려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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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의 특급 소방수 왕치산(王岐山) 중앙기율검사위원회(기율위) 서기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반(反)부패 운동이 자칫 공산당 통치의 정당성을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5일 밤 기율위 사이트의 ‘학사천오(學思踐悟·배우고 생각하며 실천하고 깨닫자)’ 란에 “정치적 신념은 굳건히, 임무는 완벽히 수행하자”는 글을 올렸다. “엄중하고 복잡한 상황이지만 신념만이 반 부패의 힘과 기조를 지속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15일 같은 코너에 실은 ‘수목삼림론(樹木森林論)’과 일맥상통했다. “만연한 부패 척결 중 병든 나무는 치료하고, 썩은 나무는 뽑아야 하지만 숲은 보호해야 한다. 수목과 삼림의 관계를 파악하라”고 주문했다. 당 군기반장인 왕 서기가 썩은 나무를 도려내려다 숲을 훼손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왕 서기는 2013년 웨이보(중국판 트위터)를 통해 공개한 재판을 통해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시 당서기에 대해 권력 투쟁 부분은 뺀 채 수뢰·독직·직권남용죄로 무기징역형에 처한 막후 연출자다. 지난달 11일에는 저우융캉(周永康) 전 정치국 상무위원을 수뢰·직권남용·기밀누설죄로 무기징역형을 선고했다.

 저우의 판결 다음날 당 중앙은 ‘저우융캉 위법 범죄사건 및 교훈에 관한 통보’를 한국의 군수와 중앙부처 과장에 해당하는 현처(縣處)급 간부 이상에 하달했다. ‘통보’에는 공개된 저우의 세 가지 죄목 이외에도 권력 탈취, 비선 조직 정치 활동, 당조직 변경 음모, 당의 기율과 규범 위반 문제가 중점적으로 적시됐다고 홍콩 주간지 아주주간이 보도했다. 이로써 저우융캉, 보시라이, 쉬차이허우(徐才厚) 전 중앙군사위 부주석, 링지화(令計劃) 전 정협 부주석으로 이뤄진 ‘신4인방’이 2007년 17차 당대회 직후부터 모의했다고 알려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에 대한 권력 탈취 음모가 일망타진됐다.

 링 전 부주석에 사법 처리는 올 가을 열릴 18기 5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5중전회)에서 중앙위원 직함을 박탈한 뒤에 가능하다. 홍콩 명보는 지난달 링지화가 정신병에 걸렸다고 보도한 바 있다. 오는 9월 3일 천안문 앞에서 펼쳐질 군사 퍼레이드는 시 주석의 권력 투쟁 최종 승리를 축하하는 결정판이 될 전망이다.

 왕 서기의 고민은 지난 4월 23일 『역사의 종말』의 저자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와의 회담에서 잘 드러났다. 두 사람 모두 이름에 한자 산(山)이 들어간다고 해서 붙인 ‘이산회(二山會)’ 대담(전문은 중앙일보 웹사이트 www.joongang.co.kr)에서 왕 서기는 후쿠야마 교수에게 “종교는 교파간 갈등을 어떻게 해결했나”고 물었다. 당내 갈등이 존재함을 암시한 부분이다. 후쿠야마는 “교파간 충돌은 상호 견제를 이끌었다. 최종적으로는 신이 유일한 진리 감별의 표준”이라며 “법(신)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 정부에 대한 사법 독립이 나온 맥락”이라고 답했다. 왕 서기는 “불가능하다”며 “사법 역시 당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중국 특색”이라고 말했다. 왕 서기는 “선진국 인구를 모두 합쳐도 11억에 불과하지만 중국 인구는 13억명”이라며 “이들을 깎아지른 절벽으로 가도록 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미국이 조장한 색깔혁명(동구와 아랍권에서의 민주주의 혁명)에 대한 불만도 드러냈다. 왕 서기는 “미국의 헌법을 만든 사람은 무척 총명하다”며 “빈민과 부녀자에 이어 건국 200여 년이 지나서야 흑인에게 선거권을 줬다. 다른 나라에게는 거꾸로 (민주주의) 복제를 요구한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은 10여 세대가 지나야 현대화가 가능하다”는 덩샤오핑(鄧小平)의 발언을 시 주석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했다. 부패 청산과 체제 유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하는 중국 공산당이 서방의 압박에도 꿋꿋하게 나아갈 것임을 밝힌 것이다.

신경진 기자 shin.kyung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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