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사태로 유럽 분열되나…60년 넘는 유럽통합의 거대한 흐름 흔들진 못할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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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억이 넘는 유럽인이 5일 치러지는 1100만 그리스인의 국민투표 결과를 주목하고 있다. ‘트로이카’라 불리는 국제채권단의 구제금융안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에서 반대가 우세할 경우 그리스의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탈퇴, 즉 그렉시트(Grexit)가 현실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50년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럽통합의 전통이 그리스라는 암초를 만나 위기에 봉착했다. 뿐만 아니라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즉 브렉시트(Brexit)까지 기다리고 있어 유럽의 분열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 영국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영국의 EU 회원국 잔류 여부에 대해 2017년까지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는 선거 공약을 했다.

그렉시트와 브렉시트가 실현된다면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지역통합의 모델이었던 유럽은 커다란 상처를 입는다. 고대 그리스는 서양철학과 민주주의를 낳은 유럽 문명의 역사적 뿌리다. 그리스 없는 유럽은 공자가 빠진 중국 문명이나 다름없다. EU는 ‘돈 몇 푼’ 때문에 뿌리를 파멸시키고 축출해버린 몰상식한 자본주의 세력으로 몰릴 수 있다. 영국 역시 의회주의와 산업혁명으로 근대 유럽을 낳은 정신적 지주다. 그리고 독일·프랑스·이탈리아와 함께 여전히 유럽의 ‘빅4’ 가운데 한 나라다. 영국이 사라진 유럽은 다리 하나가 부러져 버린 탁상과 같다.

이탈이냐, 충성이냐, 목소리내기냐

28개 EU 회원국 가운데 왜 하필 영국과 그리스가 탈퇴의 대상으로 언급되는 것일까. 그렉시트와 브렉시트라는 공통 어원인 ‘엑시트’의 국제정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경제학자 앨버트 허시먼은 『엑시트(Exit·이탈), 보이스(Voice·목소리), 로열티(Loyalty·충성)』라는 저서에서 한 조직에 속한 행위자의 선택지를 셋으로 요약했다. 조직에 충성하거나 목소리를 내거나 또는 이탈해 버리는 전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EU에는 꾸준히 충성의 태도를 보이는 핵심 그룹이 존재한다. 1951년 파리에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출범시킨 프랑스·독일·이탈리아 그리고 베네룩스 등 6개국의 창립 멤버다. 이들은 자신이 유럽의 중심이라는 의식이 뚜렷하고 주인으로서 유럽을 이끌어나가려는 적극성을 갖는다. 유로존 위기 이후 유럽의 리더십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는 ‘메르코지’나 ‘메르콜랑드’는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또는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을 합성한 쌍두마차의 이름이다. 강한 유럽 정체성을 바탕으로 내는 이들의 목소리는 은근하지만 확고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창립 멤버들이 유럽의 핵심이라면 상대적으로 뒤늦게 통합에 동참한 후발 멤버들은 유럽의 주변을 형성한다. 이들은 주인의식보다는 유럽을 통해 국익을 단기적으로 극대화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특히 영국의 캐머런 총리과 그리스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는 각각 보수와 극좌파로 정치성향은 다르지만 유럽문제에 관해서는 공통점을 보인다. “내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탈퇴해 버릴 수도 있다”는 ‘벼랑 끝 전술’ 말이다. 엑시트로 협박하며 목소리를 키우는 전략을 편다.

불행히도 캐머런이나 치프라스의 벼랑 끝 전술은 유럽정치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치프라스는 메르켈을 협박해서 양보를 얻어내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유럽정치는 한 사람이 결정을 내리는 리더십이 아니다. EU의 28개국, 또는 유로존의 19개국을 상대로 계속 설득하고 합의를 만드는 컨센서스의 리더십이고 화합의 국제정치다.

2010년 유럽의 재정위기 이후 그리스는 5년 동안 허리띠를 졸라맸지만 같은 기간 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 발트 3국은 제 살을 깎는 고통 끝에 간신히 유로권에 가입할 수 있었다. 2009년 유로존에 동참한 슬로바키아의 연금이나 복지는 그리스보다 낮은 수준인데 왜 자신이 그리스를 도와야 하냐고 불만이다. 또 그리스에 대한 지원 확대는 포르투갈·아일랜드·스페인 등과의 형평성 문제를 야기한다.

EU는 이미 강력한 정치네트워크 구축

영국의 캐머런 역시 국민투표라는 배수진을 치고 유럽을 상대로 영국에 유리한 조건을 얻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6월 유럽의 주요 지도자들은 캐머런의 제안에 시큰둥한 반응으로 이 전략의 험난한 미래를 알려주었다. 유럽에 회원국의 이탈은 초유의 불행한 사건이지만, 해당 국가에게는 국운이 휘청대는 모험이고 도박이다.

유럽통합의 긴 역사를 보면 한 나라의 이탈이 회복 불가능한 사건은 아니다. 영국은 ECSC에는 아예 참여하지 않았고, 유럽경제공동체(EEC)에도 1973년에야 동참했다. 유럽통화체제에 한동안 합류했지만 유로는 채택하지 않았다. 향후 영국이 국민투표로 EU 탈퇴를 결정하더라도 나중에 돌아올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그렉시트는 단일화폐 유로 탈퇴로 더 복잡한 과정이지만 이 역시 복귀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시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사이 그리스 경제와 국민이 폭력적인 위기의 충격에 노출될 뿐이다.

5일 그리스의 투표 결과에 따라 세계의 금융시장은 물결칠 것이고 유럽정치 역시 큰 파도를 맞을 것이다. 하지만 유럽통합이라는 거대한 운동을 근본적이고 획기적으로 바꿀 것이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만큼 유럽통합은 이미 반세기 이상 유럽의 국가들을 긴밀하게 엮어 하나의 강력한 정치 네트워크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그렉시트 도미노 현상 우려 없다

유럽의 화폐통합계획은 1960년대 이미 만들어졌다. 1979년 설립된 유럽통화체제(EMS)는 1992~93년 외환위기로 붕괴되었고, 세계의 경제전문가들은 단일화폐가 물 건너갔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1999년 유로는 탄생했다. 2010년, 그리고 2012년, 전문가들은 다시 유로의 종말을 노래했지만 유로는 아직도 살아있다. 유로는 분명 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인간이 만들어 운영하는 제도치고 완벽한 것은 없다. 유로는 처음 만들기가 어려웠지만 성공했다. 이젠 무너지는 것이 더 어렵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인 시각이다. 일부에서 그렉시트의 도미노 현상을 우려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회원국의 충성이 강화되는 결집효과를 예상할 수 있다.

이탈리아의 정치학자 바르톨리니는 허시먼의 이론을 유럽통합에 적용했다. 그는 유럽이라는 새로운 권력중심의 형성을 과거의 국가발전과 비교하면서 반복적인 경계 만들기와 다지기가 진행된다고 설명한다. 그리스와 영국 등 유럽의 경계에서 나타나는 흔들림과 망설임은 유럽통합의 취약성이 아니라 오히려 권력중심의 강화현상을 반영한다는 뜻이다. 안과 밖을 확연하게 구분 짓는 경계 다지기라는 거시적 시각은 다소 혼란스런 뉴스의 폭풍 속에서 무척 유용하다.

조홍식(숭실대 교수·사회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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