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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프랑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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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배명복
배명복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한·불 포럼 대표단의 일원으로 지난주 파리에 잠깐 다녀왔다. 하루 종일 계속된 토론에 지친 한국 손님들을 위해 프랑스 측이 준비한 스케줄은 프랑스 학술원(Institut de France) 방문이었다. 1년에 한 번, 9월 셋째 주말에만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특별한 곳이다. 17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웅장한 대리석 건물이 인상적이다.

 프랑스 학술원의 기원은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00E9>mie fran<00E7>aise)다. 루이 13세 국왕의 재상이었던 리슐리외 추기경이 프랑스어의 정화(淨化)와 유지·보존을 위해 1635년 창설했다. 혼란스러운 철자법과 발음부호를 확정하고, 이탈리아어나 영어 같은 외래어의 ‘오염’으로부터 프랑스어를 지키는 역할을 했다. 종신 명예직으로 선출되는 50명의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은 프랑스어의 ‘호위무사’를 자임한다.

 프랑스의 국어 사랑은 유별나다. 모든 외래어는 프랑스어로 바꿔 표기하는 것이 원칙이다. 공문서는 물론이고 계약서나 광고문에도 프랑스어만 사용하도록 강제하는 법을 1994년 통과시켰다. 당시 문화장관이던 자크 투봉의 이름을 딴 ‘투봉법’이다. 만국 공용어인 e메일이 프랑스에선 ‘쿠리엘(courriel)’이고, 무선인터넷을 뜻하는 와이파이는 ‘악세 상 필 아 랭테르넷(acc<00E8>s sans fil <00E0> l’internet)’이다. 아이스크림이 북한에서 얼음보숭이인 것과 닮은꼴이다.

 한국 태생인 플뢰르 펠르랭 문화장관이 최근 폭탄 발언을 했다. “외래어의 유입을 막는 것이 문화장관의 역할은 아니며 외래어가 오히려 프랑스어를 풍요롭게 할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클라우드 컴퓨팅에서 해시태그, 스타트업까지 정보기술 분야를 중심으로 영어 단어가 둑을 넘은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는 현실을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려워진 탓이다. 그렇기로서니 프랑스어의 ‘수호 사령관’이어야 할 문화장관이 앞장서 프랑스어의 순수성을 훼손하려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생기기 약 200년 전 조선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문자인 한글이 창제됐다. 주어와 술어가 어긋나는 비문과 부적절한 어휘 사용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종종 구설에 오르고 있다. 말뜻을 알기 어렵다 보니 ‘번역기’까지 등장했다. 한국의 여성 대통령과 한국 입양아 출신 여성 장관이 한국어와 프랑스어의 ‘창조적 파괴’를 선도하고 있다고나 할까. 세종대왕과 리슐리외가 들으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지 모르겠다.

배 명 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