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일본부」설 부인한 일천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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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작년 9월 전두환대통령을 위해 베푼 만찬에서 「히로히또」일황이 고대의 한일관계에 언급한 말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첫째로 지금까지의 교과서등에서는 4세기로 되어있는 것을 끌어내려 「기원 6∼7세기의 우리나라 국가형성의 시대」라고 했으며 아직도 문제가 되고 있는 「대화(야마또)조정」에 의한 「임나일본부」를 일황자신이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들면 지금 일본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는 고교역사교과서 「상세일본사」를 보자. 「조선반도에의 진출」이라는 항목에는 이렇게 씌어져있다. 저자는 동경대학 명예교수 정상광정. 또 같은 대학의 전교수인 입원일남. 학습원대학교수 아옥행다라고 하는 일본 1류의 역사학자들이다.

<조선반도진출 허위>

<대화조정은 4세기 후반부터 5세기초에 걸쳐서 앞선 생산기술이라든가 철광자원을 획득하기 위해 조선반도에 진출했으며 또 소국가상태였던 반도남부의 변한제국을 그 세력아래 두었다. 이것이 임나이다.
대화조정은 더우기 백제·신라도 지배했으며 고구려와도 싸웠다.>
전형적인 황국사관 즉 대화조정사관인 것이다. 그것이 이번 일황발언에 의해 부정된 것이다. 고대 한국관계사에 관계하고 있는 나로서는 겨우 여기까지밖에 못왔나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일황발언에 「기원 6∼7세기의 우리나라국가형성의 시대에는」 라고 확실히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국가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던 4∼5세기에는「조선반도에 진출」했던 「대화조정」이 있을리가 없으며 이른바 황국사관=대화조정사관은 허구였다는 것을 말한 것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긴하지만 고대 한일관계사에 관한 일황발언에 문제가 없는가하면 결코 그렇지도 않다. 우선 지금 말한 「국가형성의 시대에는」라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다수의 귀국인이 도래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에 대해 학문·문화·기술등을 가르쳤다는 중요한 사실이 있읍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에 대해 학문·문화·기술등을 가르쳤다는」 바로 「우리나라 사람들」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6∼7세기 (엄밀하게는 7세기)에는 일본에도 고대국가가 형성되어 거기에서 대화조정이라는 것이 생겨난 것이지만 이 대화조정이란 어떤 것인가.
일본교통공사 발행 『대화순례』라고 하는 책의 모두에 있는 「역사」라고 하는 항목은 다음과 같다.

<대화는 원시 일본이 국가로서 탄생한 고향이다. 당초에는 왜라고 했지만 후에 효덕천황 (645∼654년) 때 대화가 되었으며 더 나아가서 일본에 대한 총칭이 돼버렸다.
따라서 대화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문화지대이며 정치중심지다. 그 때문에 석기시대 유적이나 궁적·제능·고분 등이 풍부하며 그 시대의 문화를 잘 말해주고 있다.
대화분지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내부 통일이나 자위에도 편리했다. 분지중심을 거쳐 대판만으로 흘러들어가는 대화천이 나호내해를 통과, 대판으로 가는 수입로가 되었다. 대화가 일찍부터 개방한 원인의 하나였다.
당시 귀화인(한씨·진씨)이 많았으며 그들의 대부분은 남대화에 있는 고시군의 비조 (아스까) 지방에 거주했으며 혹은 사인으로서 조정에 고용되거나 병사가 되었다.
혹은 공업에도 종사해 우리나라문화나 산업발전에 크게 진력했다.
불교가 전래되면서부터 비조지방은 점점 더 번영해서 크고 많은 사원이 건립되었으며 마침내 도읍지를 여기에 두게 되었다. 후에 여러차례 대화이외의 지역으로 수도를 옮기려는 계획이 있었지만 비조의 세력을 이겨낼수가 없었다. 그것은 비조지방에 많은 궁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귀화인아닌 도래인>
이들 귀화인들은 나량시대 말기에도 고시군 인구의 8할에서 9할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무렵 대화의 갈성지방에 있었던 진씨가 이끄는 이주민들은 후에 산성 (야마시로) 에 살면서 재력을 쌓아 장강, 또는 평안경으로 천도하였던 것이다.>
한씨·진씨등 『이들 귀화인들이 나량조말기에 이르러 고시군인구의 8할 내지 9할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고시군이란 이른바 대화조정이 있었던 비조를 중심으로한 지역으로 그곳이 고대 일본의 수도였으며 그 수도의 인구중 8할 내지 9할이 「귀화인」 이었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압도적인 인구를 「귀화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들을 「도래인」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 지금은 교과서등에도 「도래인」이라는 말이 채택되고 있다. 여기에 나타나는 한씨란 일본학자들에 따르면 백제·가야계 (가야제국중 하나였던 아라가야에서 한<아야>씨라는 씨족명이 생겼다) 도래인이고 진씨란 신라·가야계 도래인으로 되어있다.
이같은 『대화순례』라는 책의 「역사」항목의 근거는 일본 6국사서의 하나인 『속일본기』 보귀3연조로 이에 따르면 당시 고시군인구의 8∼9할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백제·아야계도래인인 한씨족과 그 계열의 사람뿐이다. 다시말해 대화(나량현) 에 있던 수도를 후에 산성(경도부)으로 옮긴 신라·가야계도래인인 진씨족은 포함돼 있지 않은 것이다.
당시의 수도였던 대화의 고시군비조는 백제·아야계 도래인만이 중심이 되어 있었던 곳으로 그 중심근거지는 12년전 고송(다까마쓰)총벽화고분이 발견된 비조의 회우(히노꾸마) 였다. 그것은 지금도 그곳에 남아 있는 한씨족의 씨족신이었던 방미아지신사나 제28대 맹화천황의 궁적이었다고도 하는 돌비석이 서있는 회우사적을 보아도 분명한 일이다. 또 청산무의 『비조』를 보면 「회우의 땅은 귀화인의 이주지로서 유명하다」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천무·지통천황능이 회우대내능이라고 명명된 것과 같이 이 일대를 회한라고 부른다. 회한에는 능외에 흠명천황회한판합능 문무천황회한안고강능, 길비희회한묘 등이 있어 황실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토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천수백년간 융화>
회환사적이 「선화천황의 궁적」이었다는 것을 포함하여 어째서 「귀화인의 이주지로서 유명하다」「회한의 땅」이 「황실과도 깊은 관계가 있는 토지」이고 그곳에 비조시대·대화조정의 천황능이 몰려 있는가.
특히 고대에 있어서 분묘가 쌓아진 것은 그의 본관지가 아니면 안된다는 것이 원칙이었고 지금도 그러한 풍습이 남아있다.
그리고 또 비조부근의 광능정 백제에는 백제사가 아직 남아있는데 얼마전에 내일한 작가 최인호씨등과 백제사, 그리고 대화근처의 섭진·하내·화천(모두대판부)에 있는 백제사적과 백제왕신사·백제천·백제역등을 돌아보았다. 한국에서는 이미 없어져버린 백제가 이쪽에서는 아직도 여기저기에 살아 남아 있다.
고대에 문화가 도래했다는 것은 그 문화를 가진 사람이 도래했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새로운 풍토에 융합해 1천수백년이라는 역사를 거치면서 오늘의 일본민족·일본국가를 형성했던 것이다. 또 덧붙여 두지 않으면 안될 것은 고대 한국으로부터온 도래인이 인구의 8∼9할을 차지했던 것은 대화의 고시군만이 아니라 일본전국에 걸쳐서 였다고 하는 점이다. 그것은 지금도 일본 전국각지에 남아 있는 고대유적에 의해 증명될 수가 있다.

<필자 약력>▲1919년 경남창영출생▲일본대전문부예과졸업 ▲경성일보기자 ▲소설 대표작으로 『현해탄』『일본의 겨울』『밀항군』『태백산맥』『소설 재일조선인사』『김달수소설전집』이 있으며 『일본속의 조선문화』『조선』『일본고대사와 조선문화』등 역사서적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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