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바람 세찬 건물 성장의 징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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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성탄절에서 설날로 이어지는 연말 연시는 1년중 가장 긴 축제의 분위기가 지속되는 시절이다.
먼 곳,가까운 곳에서 오랫동안 뜸했던 사람들의 인사가 글로 오고가고, 귀성이다 세배다 해서 몸으로도 오고가는,그건 참 정겨운 풍경, 매우 시적인 풍경이 펼쳐지는 시절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처럼 훈훈한 인정의 출동이 부산한 세밑의 잡답속에 문득 느끼게 되는것은 바로 나같은 중년의 나이란 꽤나 멋대가리가 없는 인생이라고나 하는 자탄이오, 자각이다.
어느 크리스머스카드나 연하장의 그림을 보더라도 할아버지의 모습 ,어린아이의 모습은 있어도 중년의 모습은 없다. 백발의 노옹이나 천진한 동자의 모습은 축제적인 분위기에 어울리는 그림이 될수 있어도 머리가 세다말고 빠지다만 중년의 인생이란 도무지 그림이 될수가 없는 모양이다. 중년의 인생이란 매우 비축제적인, 산문적인 고비라고나 해야할 것이다. 겉모양 뿐인가. 삶의 내실에 있어서도 중년의 인생에는 부모의 보호속에 세상을몰라도 되는 어린아이의 행복은 없다. 그렇다고해서 중년의 인생에는 세상을 다 알아차린, 세상을 달관해버린 백발노옹의 해탈도 없다.
축제적인 그림에 있어서나 일상적인 현실에 있어서나 할아버지와 손자아이는 친구로서 동맹하고있다. 애터비즘(격세유전) 이라, 일컫고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중년의 인생에는 그같은 친구나 동맹은없다. 「아비」와 「아들」-. 중년의 인생은 아버지와 다투고 자식과 다툰다. 이 다투는 중년이 더군다나 축제적인 그림에 어울리는 주인공이 될수는 없는노릇이다.
아이의 행복은 이미 없다. 할아버지의 해탈은 아직 없다. 아이와 할아버지의 어중간. 행복과 해탈의 이 어중간. 바로 이 어중간한 상항이 구질구질한 중년의 인생을 꾸려가고 있다. 1984년- .
나라 안팎으로 어수선했던 또 한해가 저물어간다. 시름도 많았고 시달림도 많았던 한해였다.
한반도를 둘러싼 바깥 세계의 바람도 거세게 휘몰아쳤고 한반도 내부에서도 변화의 큰 바람은 불어댔다.
거기에는 따뜻한 바탕도 있었다.
한국과 중공이 스포츠교류를 시작한 양자강바람, 교황이 한국을 방문한 바티칸바람, 23회 국제올림픽에서 한국이 10위를 차지한 로스앤젤레스 바람, 남북한 사이에 수재물자가 오가고 적십자회담·경제회담이 열린 판문점바람….
거기에는 차가운 바람도있였다.
인도 보팔시에서 수천명의 인명을 앗아간 다국적기업의 거스폭발바람, 한강의 대홍수로 2백명 가까운 목숨을 쓸어간 폭우의 바람, 판문점서 소련인 망명을 동반한 총격전 바람…. 그러나 지나가는 해에 특히 우리에게 차갑게 느껴진것으로는 한국의 컬러TV와 철강수출에 대해서 불어닥친 미국의 덤핑규제의 바람, 그리고 한국으로부터의 경제적 실리를 거둘대로 거둔 다음 파리의 북한대표부를 승격시킨 프랑스 외교의 배신스런 바람….
어떻게 보면 우리가 이처럼 바람을 맞고 있다는것, 바람을 느끼게 되고 있다는것은 우리가 이제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의 징표라고 해야 될지 모른다. 바로 한국이 「국제화」시대를 살고 있다는 징표말이다.
게다가 갈수록 울타리가 낮아지는 오늘의 국제사회에서는 어떤 나이어린 신생국에 대해서도 세상을 모르고 지낼수 있도록 바깥 바람을 막아주는 보호의 방벽은 없다. 거기에는 손자아이와 할아버지 사이와 같은 친구도 없고 동맹도 없다.
있는 것은 오직 저마다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꽤나 멋대가리가없는 『국가행동의 기본원칙, 국가의 운동법칙』이 있을 뿐이다.
「사회주의 형제국」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동맹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하는 것은 중공과 소련, 중공과 미국과의 관계가 시위해주고 있다.
한국과 중공과의 스포츠교류는 그러한 진실을 엿보게해주는 조그만한 창구였다.
국가이익앞에는 「해방의 은인」「6·25의 혈맹」이라는 화끈한 정분도 얼마나 허망한것인가 하는것은 미국의 무역정책, 프랑스의 외교정책이 우리에게 아픈 매로써 가르쳐주고 있다.
어떤 의미에선 지난 한햇동안 우리가 차가운 바깥바람속에서 겪어야했던 시름과 시달림은 우리가 이제 비로소 「국제화」사회에서 「독립」하며 살아가야되는 성장의 시름이오, 시달림이었다고 해야될지도 모른다.
새해 1985년은 광복 40주년을 맞는 해다. 일제 식민지치하에서 해방된 우리겨레가「중년」의 나이가 되는 해다. 그러나 개인적인 생애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겨레의 역사에 있어서도 중년의 연륜이란 시적인 축제의 분위기와는 별볼일 없는 매우 산문적인 고비라고 볼수도 있다.
거기에는 동자의 보호받는 낙원도 없고, 노옹의 초탈한 선경도 없다. 어린아이의 행복도 이미 없고 할아버지의 해탈도 아직 누릴수 없을때 우리가 지탱해야 될것은 무엇인가.
이성-, 중년의 이성이 있을뿐이다.
대외적으로 남의 밥이 되지 않도록 슬기롭게 처신하는 국가의 이성이다.
대내적으로 한반도에 또다시 전쟁의 불씨를 끌어들여 남 좋은 일만 시키지 않도록 술기롭게 처신하는 민족의 이성이다. 최정호 <연세대교수·신문방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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