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의 번호 18번, 나 주민규도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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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전만 해도 평범한 미드필더였던 주민규는 숨겨왔던 공격 본능을 발휘하며 K리그 챌린지의 대표 공격수로 떠오르고 있다. 그는 어릴 적부터 황선홍을 존경해 등번호 18번을 고집하고 있다. [최승식 기자]

“나와 함께 공격수로 새출발하지 않겠나?”

 프로축구 K리그 챌린지(2부리그) 서울 이랜드의 공격수 주민규(25)는 지난해 12월 축구 인생의 전환점을 만났다. 고양 HiFC(2부리그)와의 계약 만료를 앞두고 이적을 준비하던 중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서울 이랜드 창단을 준비하던 스코틀랜드 출신 지도자 마틴 레니(40) 감독이었다. 포지션이 수비형 미드필더인 주민규는 처음엔 부담감에 손사래를 쳤지만, 레니 감독의 러브콜이 이어지자 마음을 고쳐먹었다.

 주민규에게 ‘스트라이커’는 이루지 못한 꿈이었다. 어려서부터 황선홍(47) 포항 감독을 동경해 등번호 18번을 고집했고, 늘 결정적인 순간에 골을 넣는 꿈을 꿨다. 레니 감독은 “너의 킬러 본능을 읽었다. 최전방 공격수로 대성할 수 있다”며 주민규를 격려했다.

  주민규는 28일 안산에서 열린 안산 경찰청과 경기에서 15호골을 터트려 1-0 승리를 이끌었다. 주민규는 올 시즌 16경기에서 15골(2도움)을 기록하며 K리그 챌린지 득점 선두를 질주 중이다. 국가대표 공격수 이정협(상주·7골)도 멀찌감치 제쳤다. 국가대표 발탁 이야기도 솔솔 나온다.

 주민규의 활약 속에 이랜드도 2위(9승4무3패·승점31)를 달리며 창단 첫 시즌 1부리그 승격의 꿈에 다가서고 있다. 지난 25일 만난 주민규는 “기대 이상의 성적도, 갑작스런 스포트라이트도 모두 부담스럽다”면서도 “한국 축구의 간판 공격수 등번호는 18번이다. 황선홍 감독님과 이정협 외에 주민규의 18번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 수비형 미드필더가 어느 날 갑자기 공격수로 포지션을 바꾼 건 이해하기 힘든데.

 “지난 시즌에 레니 감독님이 K리그 챌린지 경기를 꾸준히 지켜보다 날 발견하신 모양이다. 시즌이 끝난 뒤 공격수로 뛰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하셨는데, 처음엔 덜컥 겁이 나 거절했다. 이후 감독님과 세 번쯤 만나 진지한 이야기를 나눴다. ‘내 눈은 정확하다. 넌 이동국(36·전북) 못지 않은 스트라이커가 될 수 있다’며 고집을 꺾지 않으셨다. 고심 끝에 축구인생을 걸고 도전한다는 각오로 수락했다.”

 - 어린 시절에도 등번호는 18번만 달았다던데.

 “2002 한·일 월드컵이 열렸을 때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그땐 내가 수비수였는데도 폴란드전에서 골을 넣은 황 감독님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등번호만큼은 18번을 고집했다. 늘 공격수를 꿈꿨지만, 나를 가르친 감독님들의 생각은 달랐다. 프로축구는 외국인 공격수 위주로 돌아가니 미드필더나 수비수를 맡아야 오래 뛸 수 있다고 설득하셨다. 그 결정 또한 존중한다. 이후 내 역할은 늘 ‘공격하고 싶은 미드필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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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니 감독이 발견한 ‘공격 재능’이란 .

 “아직 잘 모르겠다. 감독님께서는 ‘특별한 존재감이 있다’고 표현하신다. 상대를 등지고 볼을 따내는 능력이 뛰어나고 수비수와 맞설 때 임팩트가 좋다는 칭찬도 종종 듣는다. 공격수 경험이 적다 보니 동료 선수들을 활용하는 플레이가 부족한데, 그 부분에 대해 세밀한 조언도 해주셨다. 주변 분들이 ‘네가 그렇게 골을 잘 넣는 선수였냐’며 놀라시는데, 난 최전방에 서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

 - ‘황선홍의 후계자’로 불리는 국가대표 이정협과 종종 비교되는데.

 “얼마 전에 황 감독님께서 ‘이정협은 잘 알지만 주민규는 아직 플레이를 보지 못해 잘 모르겠다’고 언급하신 기사를 봤다. 그 글을 읽고 오히려 더 힘이 났다. 존경하는 분 앞에서 당당하게 내 실력을 보여드릴 기회를 빨리 만드는 걸 새 목표로 정했다. 이정협 선수는 국가대표팀에서도 실력 검증을 마친 공격수다. 내가 부지런히 따라가야 할 존재다. ”

 - 국가대표 발탁 이야기도 나온다. 8월 동아시안컵을 즈음해 기회가 올 것이라는 관측이 있다.

 “아직 부족하다. 국가대표라는 타이틀에 대해 생각조차 해본 적 없다. 다만, 언제든 기회가 주어지면 놓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내 등번호 18번이 갖는 무게감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송지훈 기자 mil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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